'변방'을 끊임없이 '최전선의 중심'으로 바꿔온 이해찬
‘한 시대의 길’이 된 그를 깊이 애도하며
이 시대 최대 과제 온몸으로 껴안아
스스로에게 엄격, 정치 원칙 일깨워
겉모습과 달리 유머 많고 속정 깊어
군림하는 정치와 단절한 '변방의식'
너무 이른 별세 소식
이해찬, 생애 마지막 공직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 부의장이었다. 그 공직이 맡긴 이 시대 최대의 과제를 온몸으로 껴안고 아낌없이 감당하다 이승을 떠난 나이가 73세. 오늘날의 수명 계산으로는 너무 이른 부음(訃音)이다. 참으로 황망하다. 하지만 이 세상을 홀연히 뒤로 한 그 별세(別世)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그가 겪었던 무수한 고초와 격투의 무게를 생각해보자면, 이런 갑작스러운 마지막 하직 인사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또한 든다. 이제는 평안하시라고, 뒷일은 염려 마시라고 말씀드리며 마음 다해 애도의 기원을 올린다.
그래도 아쉽고 아쉽다. 이해찬이 있는 시대와 그가 보이지 않는 시대의 격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가 있는 곳은 언제나 높은 수준의 윤리적 긴장으로 팽팽해졌고, 어느 한마디 그저 내뱉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했다. 불의와 마주해서는 불퇴전으로 단호했으며 스스로에게 지나칠 정도가 아닌가 싶게 엄격한 이해찬의 삶은 정치의 원칙이 무엇인지 매 순간 일깨웠다. 이에 더해 아무리 억울한 지경에 처하고 고립무원의 처지가 될지라도 단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고 꼿꼿하게 돌파해나간 태세는 허무맹랑한 요설을 퍼뜨리는 입들을 마침내 침묵시켰다.

내면의 위력
이해찬을 제거하는 것이 민주세력의 뇌를 타격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자들의 생각은 옳았으나, 이들의 공작은 언제나 실패했다. 이해찬이 가진 내면의 위력을 미처 내다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령 2016년 더불어민주당의 대표로 “모셔져 온” 김종인이 총선 공천과정에서 이해찬을 밀어낸 사건은 과거 선거에서 맞붙다가 패배했던 김종인의 이해찬에 대한 구원이 작동했던 저질스러운 행각이었으나 이해찬은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당으로 복귀했으며 7선의 기록을 남겼다. 그는 “정치적 불사조”였던 것이다.
이해찬이 그렇게 이런 저런 음해에 휘말리고 때로 가당치 않은 퇴장을 당하기도 했으나 그런 고비들을 넘어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에 이르는 역사의 현장에 언제나 중심을 잡고 우뚝 존재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그와 같은 내면의 힘을 끊임없이 기르고 발휘해왔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남들은 좀 까탈스러운 게 아닌가 여긴 그의 모습은 사실 유머도 많고 속정깊은 마음을 잘 알지 못한 탓이요, 조금의 실수나 오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수신(修身)의 공적 표현이었다. 그러니 그토록 깔끔한 삶과 군더더기 없는 말로 살아온 그이기에 삶을 마치는 순간마저도 이리 떠나는가 싶기조차 하다.
1970년대 박정희 철권통치의 유신과 이에 항거한 민청련 사건을 겪었던 세대들에게 이해찬은 하나의 명쾌한 작전지도였고 구체적인 지침 자체였다. 그는 그때마다 어디를 공격해야 할 것이며 대중들에게 어떤 구호로 나서야 할 것인지 정확히 제시해나갔다. 이부영, 김근태로 이어지는 민주화 투쟁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찬은 그런 역할을 했고, 그에 머물지 않고 가장 먼저 재야운동의 정치권 진입의 문을 여는 대열 선두에 섰다. 이는 이후 민주화 운동과 정치의 일체화를 이루는 매우 중요한 기폭제를 만들어 낸다.
당시에는 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한다, 정치적 욕심 때문에 운동했다는 듯 엄청난 비난과 오해가 있었지만 그걸 감내하면서 뚫어낸 길 위에 오늘날 한국 정치의 주류가 된 60년대생 학생운동 출신 정치인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포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기원을 가지고 있다.
이해찬의 '변방의식'
어디 그뿐인가. 그는 이미 당시 거목이었던 김대중에게도 애초 사뭇 냉철했고 몹시 까다로왔다. 그런 그의 편편하지 않은 면모를 너끈히 품어낸 김대중의 정치적 혜안과 품의 크기와 깊이도 놀라운 것이자, 일단 서로 굳게 결합한 이후 뿜어져 나온 에너지는 한국 정치사의 진로를 바꿔내는 강렬함을 보였다. 이해찬의 이러한 태도는 아무리 충심을 가지고 따라야 할 지도자라도 그에 대해 끝까지 자기확신을 점검하지 않으면 함께할 수 없다는 인식의 소산이었으며 이런 힘이 이후 연이어지는 대권 창출의 용광로를 만들어 내는 경로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해찬의 “변방의식”이다. 그에게는 엘리트주의란 들어설 자리가 없었고 따라서 권력의 자리에 있어도 “지배하는 정치”, “군림하는 정치” 역시도 그에게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이해찬을 이해할 때 바로 이 대목이 가장 중요한 지점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도 한국정치사에서 이른바 주류세력에게 내몰리고 몰린 변방의 정치인이었으며, 노무현 또한 말할 것도 없이 그 삶이 변방 자체였지 않은가. 문재인은 정치의 영역에서 아예 변방으로 은거해버린 인물이었고, 이재명으로 오자면 그는 가장 처절한 변방적 존재였다. 하지만 이해찬에게 이들은 모두 한국사회가 겪은 가장 깊고 날카로운 고통의 총체였으며 그로써 이들이 중심이 되는 최전선이 형성될 때 정치는 앞으로 진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해찬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불퇴전의 정치, 한 시대의 길
그래서 그는 당시의 소위 유력한 주류 세론에 휘둘리지 않았고 도리어 그것과 정면으로 맞섰고 그런 때문에 그는 대중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동료들에게조차도 쉽게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에 처하곤 했다. 그는 이를테면 대중적 인기가 높은 정치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걸로 그가 멈추거나 포기하거나 뒤로 물러설 리 없었다. 이 시대의 원칙이 무엇인가, 그걸 구현할 정치세력과 지도자는 누구인가를 꿰뚫어 보았고 그 판단에 확신이 서면 그대로 직진이었다. 그건 융통성 없고 대중성 없으며 유연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결국 이긴 것은 이해찬이었다. 그렇게 이겨온 그 스스로도 한때 대권가도에 나서고자 한 바 있으나, 그는 자신의 임무가 달리 있음을 자각했고 그걸 기반으로 한국정치의 새로운 주류역사를 써왔던 것이다.
이해찬이 어느 날 “민주세력 20년 집권론”을 내세웠을 때 그걸 권력의 오만이라고들 비난했으나 이는 이 나라 지배세력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강고한지를 절절하게 알았기 때문에 나온 발상과 주장임은 이제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친일잔재세력의 80년 장기집권은 문제가 안 되고 민주세력 장기집권만 문제가 된다고 하는 논지는 결국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내란세력 척결의 정치적 과제 앞에서 얼마나 가소로운지 분명해졌다.
오늘의 현실에서 “민주세력의 항상적 집권”은 따라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그 안에서 어떤 진보의 역사를 만들어갈 것인가의 경쟁만이 있을 뿐이다. 이해찬은 최소의 시간으로만 잡아도 20년이라고 했던 것이며 그로써 이 나라의 현대사가 짓밟아온 변방의 역사가 종결하고 새로운 중심이 뿌리내리는 정치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해찬은 그 존재가 “정치의 원칙”이자 “한 시대의 길”이다.
고 박원순에 대한 예의
이해찬은 언제나 담대했고 부당한 현실을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 그런 행동이 자신에게 비난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 역정 모두가 그랬다. 가령 자살로 마감한 고 박원순 시장 장례에 참여하는 것조차도 2차 가해라는 소란이 벌어지고 그런 분위기에 눌린 정치권이 입 한번 제대로 열지도 못하고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 하고 있을 때 이해찬은 “40년 친구이자 시민사회의 영역을 확장한 동지”라며 그의 빈소를 찾았다.
이런 이해찬을 공격하고 깎아 내리려는 언론공작은 집요했고 그런 맥락에서 어느 기자가 박원순 의혹 제기 운운하자 그 자리에서 “어디서 이런 예의 없는 짓을 하는가”라고 대노하며 크게 질타했다. 자신에 대한 비난, 음해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사안의 본질에 대한 원칙을 지키는 것, 그것이 그의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이해찬의 부활을 꿈꾸며
그와의 오랜 사적 인연은 여기서 굳이 거론하지 않으려 했으나,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닷새 뒤인 5월 28일 내가 프레시안에 쓴 “호민관 노무현의 부활”이라는 글을 읽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연락을 취해왔던 일은 기록한다. 까닭이 있다. 오랜만이었다. 이후 노무현 재단 이사장이 된 그는 내게 재단 계간지 <광장>에 기고를 부탁해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가 앞서 말한 “호민관 노무현의 부활” 글의 일부를 인용해 노무현 대통령 49재를 기념한 추도문을 <광장>에 실은 바가 있었다.
이해찬은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명박 정권의 폭압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다.
“앞으로 3년 반 동안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지치고 포기하면 우리 다음 세대는 꿈과 자유와 생명을 잃습니다. 우리가 저들의 만행을 두려워하면 우리의 자존심과 양심마저 잃습니다. 우리가 현혹당하면 눈과 귀를 잃고 마음까지 잃게 됩니다. 현 정부의 역주행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기회와 시간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부활해야 합니다. 조문행렬의 마음속에 부활한 노무현의 가치를 실현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강물이 바다를 포기하지 않듯이.”
그러면서 다음의 문장을 이어 나갔다.
“김민웅 교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부활'은 '봉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탐욕스러운 주류의 핍박으로 이미 죽었다고 여긴 변방의 힘이 역사의 중심에 서고, 모두를 새로운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일깨우고, 역사적인 실현의 장에 나서게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부활의 사회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조광조의 기묘사화, 실학파에 대한 신유박해에 비유되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역사 속에 묻어버려서는 결코 안 됩니다. 가치는 역사에서 찾고 방법은 현실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 국회의원 7선, 교육부 장관, 국무총리, 당 대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의 직함을 가지고 살아온 이해찬. 그런데 그런 공적 직함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가 원칙과 시대정신을 정치의 본체로 삼아 자신의 공생애를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그건 누림이 아니라 섬김이었다. 이것이 그가 존경받는 까닭이며 정치에 있어서 국민적 사표가 된 진실이다.
우리는 윤석열 정권을 겪으면서 더욱 심각한 만행을 목도하고 체험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치지 않았고 이겨냈다. 봉기했기 때문이다. 내란세력들의 준동은 여전하다. 이런 때 이해찬은 우리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다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강물이 바다를 포기하지 않듯이.” 그렇게 우리는 매일 부활의 역사를 써나갈 것이다. 이해찬과 함께 변방이 최전선의 중심이 되는 역사를 꿈꾸며. 자신을 모두 바쳐 마지막 순간까지 공적 헌신을 다한 “이해찬” 그의 이름, 날로 더욱 불멸의 역사로 아로새겨질 것이다.
< 김민웅 촛불행동 상임대표 >
'노무현 동지·이재명 멘토' 이해찬 전 총리 끝내 별세
베트남 방문 중 호흡 곤란, 심근경색…향년 73세
박정희·전두환 맞선 민주화 투사 출신 7선 정치인
김대중 정부 교육장관, 노무현 정부 총리 등 역임
민주당 대표 맡으며 21대 총선 180석 압승 견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참여정부 국무총리 등을 지냈던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5일 오후 별세했다고 민주평통이 밝혔다. 향년 73세.
이 수석부의장은 지난 22일 베트남 호찌민에서 열린 민주평통 아태지역회의 운영위원회 참석차 출장을 떠났다. 이미 출국 전부터 몸살 기운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23일 오전 몸 상태가 안 좋다는 판단으로 귀국 절차를 밟았으나, 오후 1시쯤 귀국을 위해 베트남 떤선녓 공항에 도착한 이후 호흡 곤란으로 호찌민 탐안(Tam Ahn)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 이송 과정에서 심폐소생술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상황을 보고 받은 이재명 대통령은 곧바로 조정식 대통령 정무특보를 베트남 현지에 급파했고, 조 특보 외에도 더불어민주당 김태년·이해식·이재정·최민희·김현 의원도 베트남에 도착해 이 수석부의장을 문병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현지 심장 전문 의료진은 심근경색 진단을 내리고 이 수석부의장에게 스텐트를 삽입하는 시술을 시행했지만, 끝내 의식 회복을 하지 못하고 현지시간으로 25일 오후 2시 48분 숨을 거뒀다.
민주평통은 "현재 유가족 및 관계기관과 함께 국내 운구 및 장례 절차를 논의 중"이라며 "확정되는대로 다시 알려드리겠다"고 공지했다. 그러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시고, 유가족분들께 따뜻한 위로를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이 수석부의장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 투사이자 7선 국회의원과 국무총리를 지낸 민주주의 역사의 산증인이다.
1972년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 박정희 유신 체제에 맞서 학생운동에 투신한 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상황실장을 맡으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끌어내는데 앞장섰으며, 198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민주당에 들어가 정계에 입문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서 민주정의당 김종인 후보를 꺾고 국회에 입성한 뒤 17대까지 내리 5선을 지냈다.
1989년 국회 청문회에서 전두환에게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외친 일화는 지금도 널리 회자된다. 초선 의원 시절, 노동 분야 입법 활동에도 주력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 이상수 전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도 불렸다. 이 수석부의장의 당시 보좌관이 유시민 작가였다.
1995년 민선 1기(초대)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맡았고, 1998년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16대 대선 때는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기획본부장을 맡아 초선 시절 함께 활약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
2003년 국민참여통합신당 창당 기획단장을 맡아 열린우리당 창당을 이끌었고, 2004년 고건 전 총리에 이어 노무현 정부의 두 번째 총리로 임명됐다. 노 전 대통령과 '맞담배'를 피울 정도로 가까운 정치적 동지였다.

2007년 17대 대선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가 정동영 후보에 밀려 낙선했고, 이후 손학규 체제가 출범하자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선 세종시에 출마해 당선됐고 대표를 맡았으나,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사퇴 압박을 받은 끝에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2014∼2018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으며 친노(친노무현) 진영의 좌장 역할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정치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앙숙이었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서 컷오프(공천 배제)됐고, 탈당 후 무소속으로 세종에 출마해 당선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당선 후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한 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당 대표로 선출됐다. 참여정부 시절 함께 했던 문 대통령과 호흡을 맞추며 당청 관계를 공고히 했으며, 코로나19 대유행 속에 치러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 180석 압승을 이끌었다. 1987년 6공화국 체제 출범 이후 민주진영 최대의 승리였다.
이 수석부의장은 '마지막 소임'이라고 밝힌 당 대표 임기가 끝난 뒤 2020년 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했으며, 2024년 22대 총선에서도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당시 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의 '멘토' 역할을 했다. 지난해 10월 제22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임명돼 이재명 정부의 대북·통일 정책 입안을 뒷받침했다. < 김성진 기자 >

이해찬 전 총리 장례, 엿새간 기관 · 사회장으로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의 장례가 26일부터 엿새간 기관·사회장으로 엄수된다.
민주평통은 이날 이 수석부의장 장례를 26∼31일 기관·사회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특1호실)에 마련된다.
사회장은 국가와 사회 발전에 공훈을 남긴 사람이 사망했을 때 관련 단체가 중심이 돼 각계각층 인물들과 장례 위원회를 꾸려 거행하는 장례 의식이다.
이 수석부의장의 장례는 민주평통과 더불어민주당이 공동 주관한다. 민주평통 쪽은 “이후 실무적인 내용은 관계기관 간 협의를 통해 확정해 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 수석부의장은 지난 25일 베트남 호찌민에서 향년 73살 일기로 별세했다. <장예지 기자>
이해찬 “같잖은 윤석열, 내가 내란 전문”…만년에 더 노련했던 민주화 거목

젊은 시절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며 학생 운동에 투신했던 고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일흔 살 넘어 맞닥뜨린 12·3 내란에 또다시 거리로 나가 투지를 불태웠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일으킨 12·3 내란은 이 수석부의장 생애 세 번째 내란 사건이었다. 1952년생인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1년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 전두환 신군부가 1980년 일으킨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을 모두 겪었다.
이 수석부의장은 서울대 사회학과 1학년생이었던 1972년 박 전 대통령의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인 충남 청양으로 내려갔지만 “나라가 이 모양인데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느냐”는 부친의 질책을 듣고 바로 서울로 상경해 학생운동 동아리에 가입했다고 한다.
그는 1974년 유신정권에 반대하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투옥돼 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전두환 정부 때인 1980년엔 김대중 전 대통령 등 민주화 인사들이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신군부의 조작 사건에 휘말려 2년6개월간 복역하다 1982년 특별사면 됐다.
2024년 12월3일 현직 대통령에 의한 위헌·위법적 비상계엄이 선포됐으나 그는 담담했다. 44년 만에 목도한 내란은 빈틈투성이었다. 그는 지난해 10월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나와 “집사람이 계엄이 선포됐다고 잠을 깨웠다. 미친놈들 하고 그냥 또 잤다”, “시시하다”고 내란 당일 상황을 돌이켰다.
“시시한 계엄”이었지만, 엄연한 “내란”이었다. 윤 전 대통령이 극도로 위험한 인물이라는 생각도 확고했다. 계엄 이전부터 강력한 대여 투쟁을 주문했던 그는 계엄 직후 거리로 나가 “하루라도 빨리 끌어내야 한다”, “저렇게 무도한 놈은 정치하면서 처음 봤다”, “싸가지 없고 예의도 없다”며 ‘윤석열 탄핵’을 외쳤다.
그는 2024년 12월8일 세종시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저는 박정희 독재하고도 싸웠고, 전두환 독재하고도 싸웠는데 이 같잖지도 않은 놈하고 싸우려니까 재미가 없다. 정말 같잖지도 않다”며 포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내란은 제가 전문가다. 박정희 때도 내란 음모로 잡혀갔고, 전두환 때도 내란 음모로 잡혀갔는데, (윤석열이) 엉성하게 해서 사람들 기분 나쁘게 하고, 놀라게 했다”며 “토요일엔 반드시 (윤석열을) 탄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말대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토요일인 같은 달 14일 국회를 통과했다. < 심우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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