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벌 패러다임 세울 기회 저버려” “사법부 억지논리” “어떻게 면죄부가 아닌가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누리집 웰컴투비디오운영자 손아무개(24)씨에 대한 미국의 송환 요청이 기각되면서 시민사회와 여성들의 분노가 들끓고 있다. 손씨가 극악한 성착취 범죄의 가해자여서만은 아니다. 이미 손씨가 국내 사법체계에서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상황에서 미국으로 송환하는 것만이 강력한 처벌을 받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봐왔기 때문이다. (n)번방 사건 등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강력 처벌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뤄가던 시점에 나온 판단이어서, 사법체계 자체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단 목소리가 나온다.

7일 서울 서초구 고등법원 앞에선 손씨의 송환 불허 결정을 규탄하기 위한 여성들의 1인시위가 잇따랐다. 교사 (가명·38)씨는 하루 앞선 6일 구미에서 올라와 1인시위에 나섰다. 씨는 유명 정신과 의사로부터 그루밍 성폭력을 당한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다. 그는 아이들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 대해서 저런 식으로 솜방망이 처벌을 한 데 절망스럽다. 아이들 가르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고 말했다. 씨는 직접적인 성폭력 피해도 힘들지만 사법부가 제대로 처벌하지 않아 벌어지는 2차 가해가 피해자에겐 가장 가혹하다고 덧붙였다.

여성들은 무엇보다 미국에서라면 평생 교도소에서 나오지 못했을 손씨에게 16개월형을 줬던 법원이 성착취 범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립되길 희망한다며 미국 송환을 불허한 데 대해 분노했다. 이미 국내 사법체계는 실기했다는 것이다. 손씨가 저지른 범죄의 전말이 대중에게 드러난 것은 30여개국이 공조수사를 벌인 뒤다. 1인시위 참가자 (24)씨는 재판부가 우리나라에서 처벌이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손씨는) 이미 형 집행이 끝났다. 다시 재판도 못 하는데, 어떻게 이런 판결이 면죄부가 아니라고 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도 성명을 내어 손씨는 2년 넘게 4개국이 공조하고 32개국이 협조하여 겨우 검거한 범죄자다. (재판부 설명에서) ‘한국의 사법부가 못 하는 단죄를 미국 사법부가 한다는 불명예를 피하기 위한 견강부회라고 규탄했다.

이 때문에 성착취·성폭력 범죄에 대해 합당한 처벌을 요구해온 목소리가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전세계 128만명의 회원을 상대로 3천여개의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유통한 손씨가 16개월 만에 교도소를 나와 귀가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여성위원회 오선희 변호사는 손씨 인도 건은 사법부가 성착취로 수익을 내는 기형적 범죄 구조를 해결해나가겠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줄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사법부는 그런 기회를 또다시 저버렸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누리집 웰컴투비디오운영자인 손아무개씨가 지난 6일 오후 법원의 미국 송환 불허 결정으로 석방되어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면서 온라인상에선 사적 정의를 구현하려는 이들의 행동도 이어지고 있다. 일종의 자경단인 셈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엔번방 가해자들의 사진 등 신상정보를 올리는 계정이 등장하는가 하면, 최근엔 디지털교도소라는 이름의 신상공개 누리집도 생겼다. 여러 성폭력 사건 가해자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곳이다. 신원을 밝히지 않은 운영자가 관리하는 곳으로 누리집 운영자는 동유럽권 국가 벙커에 설치된 방탄 서버에서 강력히 암호화되어 운영되고 있다며 참여를 독려했다. 이에 대해 오 변호사는 여성들이 자력 구제밖에 방법이 없다고 느낀 결과라며 엉뚱한 사람의 신상이 공개되는 등 또 다른 피해가 생겨날 수 있다. 국가가 본질적 문제 해결에 실패하면서 모두를 악순환에 빠뜨린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여성들이 직접 사법부를 성평등하게 바꿔나가자는 움직임도 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대법관 후보자 30명 전원의 성인지 감수성을 직접 시민들이 검증하자는 글이 공유되고 있다. 이날 1인시위에 참여한 (28)씨는 더 이상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느꼈다. 사회가 더는 성범죄에 눈감지 않고 오래 분노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박윤경 전광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