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교회와 성도들의 거듭남을 향한 새해 아침의 소망

“교회는 복음으로 어둠 밝히는 세상의 빛”

지난 해 한국 기독교계는 수 차례 쓴 잔을 마셔야 했다. 불교계는 무소유를 가르친 법정스님으로 인해 위상이 높아졌고, 천주교도 남 수단 (Sudan)에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한 이태석 신부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좋은 이미지를 가졌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일부 목회자들의 부도덕한 치부를 드러내야 했다. 제자교회 정삼지목사는 횡령죄로 구형을 받았고, 강북제일교회는 목회자 지지 문제를 놓고 교회가 찬반으로 갈라져 서로 예배당을 점령하려다 결국은 경찰의 제지를 받아야 했던 일까지 생겼다. 총회 재판부와 세상법정이 각각 양쪽의 손을 들어 주어 문제는 더 복잡하게 되었다. 여기에 한기총 문제도 심각했고, 여의도 순복음교회 마져도  친인척 등용으로 인한 갈등과 대립으로 꽤나 시끄러웠던 한 해였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13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복음이 처음 조선 땅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는 소망없는 백성에게 힘을 실어준 종교였다. 1885년에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학교를 세우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다. 세워진 학교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유능한 일꾼들이 배출되었고, 병원을  세워 병든 자에게 소망을 주었다. 기독교는 잘못된 관습을 철폐했다. 5백년 이상 사람 취급을 못받던 백정들의 인권을 회복했고, 남존여비 사상에 묶여 있던 여성을 해방시키고 교육시켰다. 가장 중요한 업적은  나라를 잃고 침통함 속에 빠져 있는 민족에게 소망을 주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언젠가는 나라를 되찾을수 있다는 소망을 주는 정신적 지주의 역활을 했다. 우리가 받은 기독교 복음은 개인의 축복이나 구원에만 국한된 종교가 아니라, 위태로운 역사 앞에서 나라와 민족을 살린 종교였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는 매우 달라진 모습이다. 사회를 변혁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한 모습이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지적 장애인들에게 직장을 창출하거나 치매 노인들에게 거주공간을 만들고 돌보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여기 저기에서 터지는 스캔들을 보면서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진단하지 않을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지난 한 해만도 한국교회의 갱신을 다루는 책들이 여러권 나왔다. 한 예로 거룩한 빛 광성교회 정성진 목사가 쓴 <주여! 제가 먼저 회개합니다>을 읽어보면 한국교회와 성도가 회개해야 할 다섯가지 죄로 불순종, 물질숭배, 분열, 명예욕, 음욕을 꼽았다. 풀러신학교의 이학준 교수는 <한국교회, 패러다임을 바꿔야 산다>에서 한국교회를 결박하고 있는 세력들로 기복주의, 가족주의, 개교회주의, 성장논리와 우상숭배, 이분법적 사고, 이성 경시 현상, 단순논리주의 등을 들었다. 
나는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는 교회의 사유화이고 둘째는 신앙과 도덕성의 이원화이다. 
먼저, 교회의 사유화 (privatization)란 교회가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 세워진 사적인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공적인 존재로 있지 않고 자신의 성장과 편안함에 목적을 둔 것을 말한다. 그런 교회는 ‘내 교회 성장위주 ‘이런 면에서는 중세기 교회가 이미 지나간 길을 또 걷는 것과 같다.
 
교회의 사이즈에 상관없이 모든 교회는 어렵고 소외된 자들을 돕고 믿지 않는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하는 신앙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유혹에 빠지고 교회의 존재목적을 상실하기 쉽다. 교회 밖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에 안착한 사람들의 종교적 편의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일종의 서비스업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교회가 커질수록 기업화 되기 쉽고, 목회자 보다는 한 기업의 CEO 멘탈리티를 갖는 위험이 있다. 자칫하면 ‘내 교회’라는 인식이 생기고, 기득권을 노리는 권력 다툼이 생기는 것은 크게 이상한 이치가 아니다. 대형교회의 세습도 ‘내 교회’라는 발상에서 나온 산물이며, 교회가 사유화되었다는 증거다.
우리는 켄터버리 대주교를 역임한 윌리암 템플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교회는 비회원의 혜택을 위해 존재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단체이다.’ 그렇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둘째는 신앙과 윤리의 이원화이다. 시편 15편을 읽어보면 시편기자가 주의 장막에 거할 자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 그리고 그는 답을 한다. 정직하고 공의롭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더러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신앙과 윤리는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신앙과 윤리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했다. 교회 안에서의 활동은 교회 안에서이고, 교회 밖에서의 활동은 교회 밖에서의 활동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했다. 이런 생각이 오래동안 누적되면 당연히 부작용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교회 안에서 성결을 부르짖어도 그 성결은 개인의 성결에 극한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성결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 성범죄율 1위, 출산율 최하위, 청소년 흡연 1위, 이혼율 2위를 기록하고 있으니 기독교인이 20퍼센트가 넘는 사회이지만 사회를 변화시키는 막강한 힘이 되지는 못했다는 결론이다. 신앙과 윤리는 분리될 수 없다. 신앙인이라면 도덕성이 강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 도덕성은 주일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market place에서도 쉽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민교회는 한국교회의 산물이기 때문에 함께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민 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
 
교회는 본질을 잊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본질은 바로 세상의 빛이 되는 복음이다. 교회는 복음으로 어두움을 밝히는 사명을 갖고 있다. 교회 안으로 몰려있는 시선을 교회 밖으로 돌려 어렵고 힘든 자들을 향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교회의 사유화는 사양길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중세기 교회사에서 배우지 않았는가? 또한 성도가 신앙과 윤리를 나누어서 생각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교회가 세상과 동화되어 도움을 줄 수 없거나, 분리가 되어 남남처럼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세상을 옳을 길로 인도할 수 없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기로에 서있다.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사는 길은 복음전파를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으로 택하고, 그 복음을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나가는 것이다.

<송민호 목사 - 토론토 영락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