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돈 목사

다운스뷰 장로교회 담임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역시나 저 멀리 보이는 무덤 앞에는 큰 돌이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큰 돌이 자리해야 할 곳이 아닌 옆으로 움직여져 있지 않습니까? 큰 돌로 막혀있을 무덤을 생각하며 어떻게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릴 수 있을까 염려하며 걷던 그들의 무거운 발걸음에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내 그 발걸음이 무거워집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있어야 할 그 자리, 하지만 그 곳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보내신 것 같아 보이는 흰 옷 입은 천사가 말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이 말 자체에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부활이라는 것은 막연한 바램이었던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기대해온 완벽한 시나리오가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절망을 털어낼 수 없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건, 이들 눈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없고, 그저 빈무덤만 남아있다는 겁니다. 빈 무덤, 사라진 예수님, 그리고 그가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이야기… 이 가운데에서 두 가지 상징이 함께 떠 오릅니다. 절망과 소망, 애통과 환희, 죽음과 부활… 함께 공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두 가지가 함께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모순적 공존, 하지만 이는 분명한 외침과도 같습니다. ‘너희가 절망의 자리에 있으나 이곳에 소망이 있다고, 너희가 애통의 순간을 마주했으나 거기에서 환희가 다가오고 있고, 너희가 죽음을 보았으나 너희는 곧 부활을 확인케 될 것’이라고 말이지요.

 

미국 감리교 신학교인 에즈베리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벤 위더링턴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2012년 1월 11일 늦은 밤, 위더링턴 교수는 서른 세 살 된 딸 크리스티의 남자친구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딸의 남자친구는 전화기에 대고 말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연락이 되지 않아 문을 뜯고 들어간 집 안에서 크리스티는 쓰러져있었고, 구급차가 왔지만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는 것이지요. 사인은 폐색전증, 곧 혈전이 폐동맥을 막아서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병이었습니다. 벤 위더링턴 교수는 열정어린 자신의 강의 말미에 딸을 잃은 아픔에 대해 고백합니다. 그 이야긴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희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희망을 가진 사람처럼 슬퍼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또한 모순적인 표현같습니다. 그는 이를 두고, 슬픔 중에도 눈 하나를 종말론적인 지평 곧 역사의 끝에 고정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역사의 끝에는 무엇이 있길래 그렇게 이야기했을까요? 거기엔 세상의 어떤 절망과 위기도 침범할 수 없는 회복과 승리의 순간, 곧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부활의 능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삶 속에서 절망을 봅니다. 슬픔을 보고 불가능을 봅니다. 소망이 꺾이는 아픔을 겪고, 여전히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인생의 무게 앞에 힘겨워합니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팬데믹의 거대한 음지 속에선 어느 누구도 앞날을 알 수 없어 답답합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 삶의 자리에도 분명 부활은 소망의 향기를 풍깁니다. 갈릴리로 제자들보다 먼저 찾아오신다고 하셨던 것처럼, 소망 없는 것 같은 우리 일상의 자리, 아직은 해결되지 않은 그 절망의 문제 속에서도 소망을 품으라 하시는 그 딜레마의 일상 속으로 우리 주님, 부활하신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으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생명력입니다. 때론 천둥 같은 힘찬 소리로, 때론 내 가슴을 찡하게 움직이는 따스한 속삭임으로… 너희에게 소망이 있다고, 너희에게 다시 살아난 내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빈 무덤 앞에서 듣는 부활의 소식 앞에 망설이거나 흔들리지 마십시다. 빈 무덤과도 같은 당황스럽고 절망스러운 일상도 현실이지만, 그 가운데 일어난 부활은 영원히 변함없는 사실이요, 능력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내 삶의 아픔을 더 큰 아픔으로 느낄 수 있게 하심 조차 감사합니다. 또한 그 아픔을 이기고 영원한 소망을 품을 수 있음이 더 큰 은혜임을 깨닫게 하심 또한 감사합니다. 아픔이라는, 애통함이라는 견고한 알을 깨고 소망과 영원한 삶이 그 안에 있음을 보게 하신, 그리고 확인케 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