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알을 품은 어미의 꿈

● 칼럼 2012. 3. 10. 19:26 Posted by SisaHan
어쩌면 이렇게도 클까. 특대란을 산 기억이 나서 아침에 달걀 프라이를 하려고 냉장고를 열다가 두 줄로 도열해 있는 알들에 시선이 잡히고 만다. 이 정도 크기면 아무리 몸집이 큰 암탉이 낳았다 해도 산통이 여간 크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알 하나하나에 ‘어머니’의 간절함과 소망이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동료 교사가 귀농을 생각하며 양계장 체험을 써 보낸 이메일을 받고 나서부터이다. 달걀은 달걀일 뿐이지 음식 재료 이상으로는 연상하지 못했는데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산고 끝에 낳은 달걀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면서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지금은 청년이 된 아들을 분만할 때 3.85킬로그램이 주던 산통이 아직까지 선명한 것처럼 어미 닭들에게도 생명을 품은 알을 낳기 위해서는 그만한 통증쯤은 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24시간 불 밝힌 양계장의 어미 닭 이야기를 글로 쓴 적이 있다. 인간의 끝간 데 없는 탐욕과 이기심과 잔혹함에 대하여, 그리고 그 알 속에 들어있을 암탉들의 불안한 정서와 누적된 피로와 인간을 향한 혐오감을 걱정했다. 나는 그 글을 쓰며 암탉과 수탉의 사랑을 듬뿍 받고 태어난 달걀이 그리웠고, 그리운 만큼 닭장 속의 어미 닭이 낳은 알들이 창백해 보였던 기억이 있다.
그 때문인지 잎싹이라는 이름을 가진 닭 생각이 난다. 동화책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으며 마당에 흩어져 노니는 닭들을 부러워하는 양계장 철망 속의 주인공 ‘잎싹’의 소망을 듣던 기억에 아마 그럴 것이다. 아무리 목을 길게 내밀어도 빠져나갈 수 없는 닭장 속의 소외된 세상. 그 안에서 내다본 마당의 햇살은 잔인하리만치 따스했고, 사랑 가득한 바깥은 철망 밖의 생명들을 위한 또 다른 세상이었다. 잎싹은 무정란인 줄도 모르는 채 제가 낳은 알을 품 안에 넣어보았다. 맨 살에 닿는 알의 촉감에 무조건적인 애정을 느끼며 껍질 속에서 조그맣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을 만큼 잎싹은 엄마가 되고 싶어 했다. 엄마가 되겠다는 헛된 소망에 사로잡혀 애를 쓰는 잎싹이 애처로워 “그건 아무리 품어도 부화할 수 없는 알이야”라고 소리쳐 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목숨을 건 탈출 끝에 이해와 사랑으로 인연을 맺은 청둥오리의 알을 정성껏 품어 부화시키는 것으로 잎싹은 철망 안에서부터 지니고 있던 오랜 소망인 ‘어머니’의 꿈을 실현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 ‘초록머리’는 어미 닭의 지극한 돌봄 속에 자랐다. 언젠가 해야지 하고 미루던 그 많은 사랑의 말들은 가슴에서 꺼내지도 못했는데, 시간은 덧없이 흘러 초록머리를 청둥오리 무리 속으로 떠나 보낼 때가 되었다. 이별을 서운해 하며 떠나는 초록머리에게, 엄마에게는 추억이 있으니까 외롭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킨 후 잎싹은 껍데기뿐인 엄마로 주저앉았다. 자식도 떠나 보내고 홀로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두려워하던 엄마 닭은 숨쉬는 것만큼이나 간절한 또 하나의 소망이 제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날고 싶다는 소망, 알을 품어 산란하는 어미로서의 사랑만큼이나 소중한 제 꿈이 있었음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지금 내 앞의 이 달걀을 낳던 어미 닭도 꿈이 있었을까, 있다면 어떤 꿈이었을까. 이루지 못했을 것만 같은 꿈. 그건 어미가 닭장에 갇혀 있으면서 자신의 꿈까지 가두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무정란처럼 부화할 희망이 없는 꿈이었기에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다. 본능처럼 그들 핏속에 흐르는 ‘날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 가두고 살 수 있었을까. 잎싹처럼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너무 강해서 본래 제가 지닌 꿈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철망 속의 운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던 것일까. 
어미 닭의 소망을 통해 내 안에 아직도 살아있을지 모를 이루지 못한 꿈의 조각들을 들춰본다. 커피를 잔에 가득 담아 아침햇살 가득한 식탁에 앉아 생각한다. 나의 꿈을, 엄마가 되고 싶다는 소망 저 아래 깊숙이 묻혀있을 아득한 나의 꿈을.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협 회원, 한국 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