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칼럼] 가을비와 감자탕

● 칼럼 2021. 11. 2. 13:15 Posted by 시사 한겨레 ⓘ한마당 시사한매니져

[1500자 칼럼] 가을비와 감자탕

 

임순숙 수필가

 

곱게 물든 단풍을 제대로 품어보기도 전에 얄궂은 가을비가 연일 기승을 부린다. 기나 긴 겨울을 탈없이 지내려면 활화산 같은 풍경화 몇 점 정도는 가슴 속에 저장해야 하련만,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는 단풍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계절 막바지에서 야외 나들이를 계획했다가 일기관계로 접고 나니, 뜰 안 가득 내려앉은 물먹은 낙엽처럼 마음도 침울해진다. 이런 때 일수록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즐거운 일거리를 궁리하다가 예정에 없던 감자탕을 떠올리며 인근의 중국마켓으로 향했다. 매장엔 때이른 아침녘인데도 다른 날보다 더한 손님들로 북적였다. 나처럼 애궂은 날씨 때문에 일정을 우회한 이들이 아닐까 단언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나의 쇼핑 카트가 그득해졌고, 침울했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요리할 즐거움에 날개를 퍼득이고 있었다. 

 

두툼한 살고기가 붙은 돼지 등뼈는 핏물을 뺀 다음 스토브에 올리고, 제철에 손질하여 저장해둔 우거지와 고사리, 깻잎 등을 냉동고에서 꺼내어 해동시킨다. 대부분의 한식이 그렇지만 감자탕은 특히 시간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어서 평소엔 이틀에 걸쳐 끓이기 일쑤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기꺼이 끝을 보려 안간힘을 쓴다.

 

주먹만한 감자 여섯 개를 골라서 껍질을 벗긴다. 순간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의 감자가 따끈하게 폐부를 파고 드는 듯 하다. 감자탕에서 빠지면 섭섭한 노란 감자는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오묘한 맛으로 고기와 야채 틈새를 파고 들며 늘 존재감을 과시한다.

한때 감자탕의 ‘감자’는 돼지 등뼈 부위를 지칭한다고도 했고, 또는 고깃국에 감자가 들어가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했다. 애매모호한 돼지등뼈와 감자의 관계, ‘감자탕’이란 이름의 어원이 현재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갖가지 설만 난무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돼지뼈가 음식의 주재료로 쓰이기엔 미흡한 부분이 있어 이를 감추기 위해 감자를 내세웠다는 설과 고기가 귀하던 시절 고기뼈 우린 국물에 감자를 넣어 끓여 먹었다는 설이다.

또한 ‘감자탕’은 영어명에서도 혼돈을 초래한다. 영어로 직역을 하면 명칭과 실제요리가 매치가 되지 않아 해외 유튜브 등에서는 Pork Bone soup 으로, 국내에선 Pork back-bone stew 를 표준화된 명칭으로 표기한다.

평범한 하나의 음식에 엄청난 사례와 관심, 끊이지 않는 변화와 발전은 그만큼 대중의 사랑이 깊다는 의미이리라. 감자탕의 주인공이 돼지 등뼈면 어떻고 감자면 또 어떠하리.

 

누릇한 돼지기름을 말끔히 걷어낸 고기 솥에 잘 익은 된장을 넉넉히 풀고 주인공이라 자처하는 감자들을 제일 먼저 투척한다. 연이어 준비된 배추 우거지와 고사리, 버섯 등 각종 채소들을 차례대로 들이밀며 화력을 조금 높이면, 금방 모든 재료가 어우러지는 화합의 율동이 여기저기서 포착된다. 뭐니뭐니 해도 감자탕 최후의 화룡점정은 넉넉한 마늘과 들깨 가루 그리고 쭉쭉 찢어 넣은 대파가 아닐까.

 

투박한 질그릇에 김이 풀풀 나는 감자탕을 그득 담아 식탁을 차렸다. 국그릇을마주한 가족들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넉넉해 보인다. 가을비 질척이는 저녁,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으랴. 단풍이 지건, 기나긴 겨울이 문앞에서 서성이건 이젠 크게 마음 쓸 일이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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