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칼럼] 까미노(Camino) 친구들에게

● 칼럼 2021. 11. 3. 02:1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1500자 칼럼]  까미노(Camino) 친구들에게.

 

임순숙 수필가

 

크리스마스를 불과 일주일 여 앞둔 오늘, 이곳엔 온종일 눈이 내렸답니다.

예전 같으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며 즐거워했겠지만 녹록하지 않은 현실 앞에 한없이 마음이 가라 앉는군요. 어느날 갑자기 밀어닥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온전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욕심내기보단 현 상태로 유지되기를 염원하며 자신을 다독였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나라 안팎 소식에 마음이 착잡합니다.

 

눈발이 옅어질 무렵 저녁산책에 나섰습니다. 차가운 눈바람에 간간이 휘청거리긴 했어도 폐부 깊숙이 박히는 상쾌함은 집안에서의 우울했던 기분을 전환시켜 주어 그런대로 좋았답니다. 집집마다 개성 껏 멋을 부린 크리스마스 데커레이션과 소담하게 쌓인 눈과의 조화로움에 한동안 감탄하다 말고 그 마음조차 깊은 고요함에 함몰되었지요. 가가호호 현란한 불빛은 내걸었지만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난제에 빠져있을 이웃들의 고뇌가 눈바람 속에 실려오는 듯 했으니까요.

적적한 동네의 길모퉁이에서 홀로 눈을 치우고 있는 이웃 주민을 향해 다소 과한 목소리로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적막을 깨는 그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염원하는 2022년 4월의 그 길도 누군가 힘있게 열어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명치끝까지 올라왔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공통의 길이 있지요. 쉼 없이 온몸으로 기도하게 하는 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말입니다.

우리들은 그 길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정을 쌓았지요. 나헤라 알베르게에서 미주네 가족과 모처럼 푸짐한 한식으로 석식을 함께했던 어느 저녁, 그리고 아껴두었던 누룽지를 서슴없이 꺼내어 아침 식사를 준비한 Mr. 우 부부의 지극한 배려로 인해 만시야에서의 강행군에 큰 힘이 되었지요. 그런 따뜻한 두 가족 옆에서 우리부부는 어떤 보탬이 되었는지, 돌아보니 늘 부족하여 미안함만 가득하군요.

비, 바람, 추위 등 자연의 온갖 심술을 길 위에서 겪어낸 후,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에 우뚝 서던 그날의 감격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런지요.

 

우리 부부는 800 km 프랑스 길을 완주하고 돌아와서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병명도 모른 채 그쪽만을 바라보며 한동안 그리움을 키웠지요. 얼마 후에야 그곳을 다녀온 경험자들에 의해 우리 같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일컬어 까미노 블루(Camino Blue) 환자라고 불리어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밖에서 길들여진 길을 일상에 들여놓고 하나의 그리움으로 애닯아 하는 현상을 일컬음이라는군요.  

 

프랑스 길을 다녀 온 일년 후, 우리부부는 ‘까미노 블루’ 환자임을 핑계삼아 여러갈래 순례길 코스 중 가장 어렵다는 북쪽길(El Camino Norte de Santiago)을 택했지요. 더 멀고 더 긴 시간동안 비우고 다스리기를 거듭하며 고행을 자처한 끝에 드디어 까미노 블루에서 벗어나는 해답을 얻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실행에 옮기자구요. 그래서 또 거룩한 계획을 세웠답니다. 2022년 4월엔 은의 길( Via de la Plata),  장장 1,000 km 넘는 길에 감히 도전장을 겁니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르퓌에서 출발하기를 희망하는 Mr. 부부, 언제든 출발 날짜만 알려달라던 미주 아버지, 언젠가 그때처럼 위에서 만나지기를 간곡히 희망합니다.

 

우리모두 코로나 바이러스 라는 난적을 물리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부디 건강하소서.

 

-까미노: 까미노 데 산티아고( Camino de Santiago)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줄여서 까미노라 함.

-알베르게: 순례자 여권을 소지한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

 

[1500자 칼럼] 가을비와 감자탕

 

임순숙 수필가

 

곱게 물든 단풍을 제대로 품어보기도 전에 얄궂은 가을비가 연일 기승을 부린다. 기나 긴 겨울을 탈없이 지내려면 활화산 같은 풍경화 몇 점 정도는 가슴 속에 저장해야 하련만,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는 단풍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계절 막바지에서 야외 나들이를 계획했다가 일기관계로 접고 나니, 뜰 안 가득 내려앉은 물먹은 낙엽처럼 마음도 침울해진다. 이런 때 일수록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즐거운 일거리를 궁리하다가 예정에 없던 감자탕을 떠올리며 인근의 중국마켓으로 향했다. 매장엔 때이른 아침녘인데도 다른 날보다 더한 손님들로 북적였다. 나처럼 애궂은 날씨 때문에 일정을 우회한 이들이 아닐까 단언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나의 쇼핑 카트가 그득해졌고, 침울했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요리할 즐거움에 날개를 퍼득이고 있었다. 

 

두툼한 살고기가 붙은 돼지 등뼈는 핏물을 뺀 다음 스토브에 올리고, 제철에 손질하여 저장해둔 우거지와 고사리, 깻잎 등을 냉동고에서 꺼내어 해동시킨다. 대부분의 한식이 그렇지만 감자탕은 특히 시간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어서 평소엔 이틀에 걸쳐 끓이기 일쑤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기꺼이 끝을 보려 안간힘을 쓴다.

 

주먹만한 감자 여섯 개를 골라서 껍질을 벗긴다. 순간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의 감자가 따끈하게 폐부를 파고 드는 듯 하다. 감자탕에서 빠지면 섭섭한 노란 감자는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오묘한 맛으로 고기와 야채 틈새를 파고 들며 늘 존재감을 과시한다.

한때 감자탕의 ‘감자’는 돼지 등뼈 부위를 지칭한다고도 했고, 또는 고깃국에 감자가 들어가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했다. 애매모호한 돼지등뼈와 감자의 관계, ‘감자탕’이란 이름의 어원이 현재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갖가지 설만 난무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돼지뼈가 음식의 주재료로 쓰이기엔 미흡한 부분이 있어 이를 감추기 위해 감자를 내세웠다는 설과 고기가 귀하던 시절 고기뼈 우린 국물에 감자를 넣어 끓여 먹었다는 설이다.

또한 ‘감자탕’은 영어명에서도 혼돈을 초래한다. 영어로 직역을 하면 명칭과 실제요리가 매치가 되지 않아 해외 유튜브 등에서는 Pork Bone soup 으로, 국내에선 Pork back-bone stew 를 표준화된 명칭으로 표기한다.

평범한 하나의 음식에 엄청난 사례와 관심, 끊이지 않는 변화와 발전은 그만큼 대중의 사랑이 깊다는 의미이리라. 감자탕의 주인공이 돼지 등뼈면 어떻고 감자면 또 어떠하리.

 

누릇한 돼지기름을 말끔히 걷어낸 고기 솥에 잘 익은 된장을 넉넉히 풀고 주인공이라 자처하는 감자들을 제일 먼저 투척한다. 연이어 준비된 배추 우거지와 고사리, 버섯 등 각종 채소들을 차례대로 들이밀며 화력을 조금 높이면, 금방 모든 재료가 어우러지는 화합의 율동이 여기저기서 포착된다. 뭐니뭐니 해도 감자탕 최후의 화룡점정은 넉넉한 마늘과 들깨 가루 그리고 쭉쭉 찢어 넣은 대파가 아닐까.

 

투박한 질그릇에 김이 풀풀 나는 감자탕을 그득 담아 식탁을 차렸다. 국그릇을마주한 가족들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넉넉해 보인다. 가을비 질척이는 저녁,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으랴. 단풍이 지건, 기나긴 겨울이 문앞에서 서성이건 이젠 크게 마음 쓸 일이 아닌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