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한마당] 뻔뻔한 자들의 정체를 안다면
‘뻔뻔하다’는 말이 요즘처럼 자주 입가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나 싶다. 세상사 곳곳에서 뻔뻔한 사람과 뻔뻔한 일들을 보고 느끼며 살고 있지만, 요사이 특히 갈등이 심해지고 격렬해진 정치판의 인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탄식이 잇달아 나온다.
‘뻔뻔하다’의 사전적 풀이는 “부끄러워할 만한 일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염치없이 태연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염치’란 “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그리고 ‘체면’은 “남을 대하는 도리”이다. 얼굴 가죽이 두꺼워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는 ‘후안무치’(厚顔無恥)도 같은 말이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거나 “철면피한 사람”이라는 말들 역시 표현의 차이일 뿐, 뻔뻔과 다를 바가 없다.
애완견을 기르는 이들은 강아지도 잘잘못을 아는 염치가 있음을 안다. 그런데 인간이 후안무치라면, 개만도 못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온갖 거짓과 허풍으로 지구촌에 ‘뻔뻔한 것도 처세술이고 무기’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던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은 여전히 입심이 펄펄하다. 일본 정치를 주무르며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일본판 대표적 뻔뻔 인물 아베 전 총리.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대통령도 그들에 못지않은 뻔뻔함을 뽐낸다. 자신의 비리를 수사하겠다는 연방경찰과 대법관을 “쓰레기”라고 비난하고 여성 국회의원에게 “강간하기엔 너무 못생겼다“고 막말을 뱉어낸 인물. 그는 코로나19 대응 잘못으로 60만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낸데다 경제마저 망친 원흉으로 탄핵요구가 130번이나 나왔지만, ”펜으로도, 판사 결정으로도 나를 끌어내릴 수 없다“고 버텨 선량한 브라질인들을 울분케 한다.
한국은 다른가? ‘K문화’의 열풍이 무색한 최고반열의 뻔뻔인사들이 뒤질세라 설쳐댄다.
상관인 참모총장에게 총을 겨눠 반역하고 수하 무리들을 동원해 정권을 찬탈한 쿠데타 주역 전두환은 저항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은 학살자로 역사에 이름을 올린 자다. 그가 법의 심판과 국민적 단죄를 받긴 했지만, 40여년 지난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죄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재산 29만원’등의 뻔뻔한 단어만 맴돌 뿐이다.
그런 뻔뻔한 자를 칭송하는 ‘더 뻔뻔한 자’가 나와 다시 국민적 분노를 돋우고 있다. “전두환이 5.18과 쿠데타를 빼고는 정치를 잘했다”고 추켜세운 망발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온 전 검찰총장이다. 현직을 그만 두자마자 정치판에 뛰어들어 검찰과 정치 모두에 오물을 덧씌우고도 그의 뻔뻔한 언행의 행로는 그칠 줄을 모른다. “배울 점이 있다는 취지였다“며 해명이랍시고 궤변을 늘어놓는 그의 수준이하 본질과 감출 수 없는 본색은 ‘뻔뻔 일지’에 추가될 때마다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 곤혹스럽다.
그는 수많은 가족비리와 의혹의 증거에도 ”음해”라고 강변한다. 검찰총장 재임 중 대통령 인사권을 무시하고, 항명을 일삼은 언행을 국민들이 똑똑히 보았는데도 “정권에 맞섰다”고 호도한다, 검찰권을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증거들, 법무부의 징계가 부족할 지경이었다는 법원의 판결에도 황당하다고 되레 발끈했다. 손바닥 ‘왕’자 소란과 주변 주술인들 증언에도 “옆집 할머니” 운운 우겨댔다. 오히려 다른 대통령 후보들의 ‘눈에 티’를 맹공하는 그에겐 자신의 눈 속 ‘들보’가 뻔뻔의 훈장인 것인지, 단 한 번도 잘못이나 사과를 입에 올린 적이 없으니 참 뻔뻔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하나님의 추궁에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열매를 주어서 먹었노라고 ‘여자를 주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다. 하와도 마찬가지,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들러댄다. 자기들 잘못은 없다는 뻔뻔의 원조다. 에덴에서 쫓겨난 그들의 원죄는 아들 가인에게로 흘러 동생을 쳐죽이는 살인죄로 발전한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문책에 그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죄에 무감각한 채 도리어 왜 나를 지목하느냐는 뻔뻔함의 전형을 드러낸다.
그렇게 ‘뻔뻔’의 역사는 인류사와 함께 해왔다. 그리고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뻔뻔한 자들은 항상 죄와 악의 편이요, 거짓과 어둠과 불의의 세력이며, ‘트러블 메이커’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빛과 진실, 양심과 선과 정의를 미워하고 두려워하여, 뻔뻔의 두꺼운 장막 뒤에 숨어 내로남불-아전인수의 변명과 궤변을 찾는 공통점이 있다. 선을 악으로 이기려다 보니 본질 흐리기, 물타기, 되치기 등 온갖 사악한 수법을 동원하고, 갈등과 이간질, 분열과 다툼을 조장하는 완력의 발버둥을 친다. 친일 매국노들, 쿠데타 독재일파, 국정농단 세력이 그랬다. 인류 역사상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만 보아도 거의가 뻔뻔한 인물들이었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고, 일제의 도조 히데끼를 비롯한 전범들, 6.25를 일으킨 김일성이나 배후의 스탈린 같은 인물들….
뻔뻔한 자들의 실체를 모르면 불행과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정체를 알고도 방관하거나 환호하면 평화와 정의를 거스른 역사의 죄인들이 된다. 그들을 옹호하며 즐기는 세력의 교활한 속셈 또한 알아내고 경계하지 않으면 큰 낭패와 곤욕을 치르게 된다.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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