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불의 교훈은 따로 있다" [문정인 칼럼]

● 칼럼 2021. 9. 5. 17:05 Posted by 시사 한겨레 ⓘ한마당 시사한매니져

카불의 교훈은 따로 있다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

 

8월15일 카불이 함락됐다. 온 세계가 충격에 빠졌지만 우리에게는 한층 더 그랬다. 6·25 전쟁 당시 한강철교 폭파와 1975년 4월30일 사이공 함락의 혼란과 비극에 대한 기억을 가진 이들에게 “인천공항이 카불공항처럼 되지 말라는 법 있느냐”는 정치인들의 말은 이를 흡사 데자뷔처럼 생생히 되살려냈을 것이다.

 

외국 언론도 한몫했다. “한국이 이런 종류의 공격을 지속적으로 받는다면 미국의 지원 없이는 빠르게 붕괴해버릴 것”이라는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 마크 티슨의 트위터 글이 언론 지면을 뒤덮었다. 한반도 문제를 오래 다뤄온 원로 외신 특파원 심재훈과 돈 커크도 “대만, 일본과는 달리 평화와 데탕트라는 공허한 슬로건을 남발하며 한-미 동맹을 저해하고 한-미 군사연습을 축소하는 문재인 정권 아래서 한국의 안보는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아프간 사태 이후 한국의 안보와 관련해 쏟아져 나온 말들은 크게 세 갈래다. 이를테면 ‘나비효과’다. 첫째, 우리 군에 대한 걱정이다. “현 정권은 우리 군을 적이 없는 군대, 목적 없는 군대, 훈련하지 않은 군대로 만들었다”는 윤석열 후보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아프간 사태에 빗대어 나온 말이라 하겠다. 둘째, 평화협정 무용론이다. 카불 함락의 근본적인 원인이 2020년 2월 체결된 미국과 탈레반 사이의 도하 평화협약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추진해온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구상도 아프간과 같은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고 비판한다.

 

마지막은 주한미군과 동맹 문제였다. 주한미군 없이 안보를 담보할 수 없는 게 현실이지만 워싱턴은 국익에 따라 언제든지 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을 붙잡아 두기 위해 동맹국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카불 철수 과정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미국이 남긴 메시지는 명확하다. 스스로 서고자 하지 않는 자는 누구도 지켜줄 수 없다. 인계철선 같은 과거의 논리에 얽매이는 것이야말로 미군에게만 기대려 했던 아프간 정부의 오류를 반복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 비판, 주문은 다분히 황당하게 들린다. 우선 한국군을 아프간군과 비교하는 것은 모욕에 가깝다. 아프간 병력의 90% 이상이 문맹이고 30만 병력 중 6만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 유령 군대였다. 각 종족과 부족에서 충원되어 이질적 오합지졸로 구성됐다는 근본적인 한계에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지휘통제체계가 겹쳐, 미국의 군수병참은 물론 공중 및 정찰감시 지원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깡통 군대이기도 했다. 세계 수위의 전투력과 겹겹이 쌓아올린 전력투자비를 자랑하는 70년 전통의 한국군을 아프간군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근 군내 성폭력 문제 등 몇몇 사례를 들어 군의 안보 의식과 전투력, 기강을 도맷금으로 폄훼하는 일은 더욱 수긍하기 어렵다.

 

도하 평화협약이 문제투성이인 것은 사실이다. 미국과 월맹 사이의 1973년 파리 평화협정도 그러했다. 협상 과정에서 트럼프 정부는 아프간 정부를 사실상 배제한 채 탈레반과 무리한 협상을 전개했고, 아프간의 국내정치적 안정이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 병력의 감축과 철수에 합의했다. 당시 협상의 가장 큰 패착이었다. 그러나 이를 문재인 정부의 평화구상과 연결짓는 것은 무리다.

 

종전선언이 미군 철수와 동맹 붕괴로 이어질 것처럼 주장하지만, 한·미 양국 정부는 종전선언이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북한의 비핵화를 추동하는 상징적 제스처이자 수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 종전선언이 한-미 동맹이나 주한미군의 위상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일은 북한의 비핵화와 동시적으로 연동돼 있다. 또한 한국 정부가 평화협상을 주도할 의지와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아프간과는 크게 다르다.

 

한-미 동맹과 주한미군의 중요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갈수록 강화되는 북한의 핵 능력에 억지태세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필수적 자산이다. 그러나 아프간의 비극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동맹과 미군을 상수로 간주하는 타성에서 벗어나 전시작전통제권의 조속한 전환을 통해 한국의 방위는 한국군이 주도하고 미군이 지원하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다. 카불 철수 과정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미국이 남긴 메시지는 명확하다. 스스로 서고자 하지 않는 자는 누구도 지켜줄 수 없다. 인계철선 같은 과거의 논리에 얽매이는 것이야말로 미군에만 기대려 했던 아프간 정부의 오류를 반복하는 일이다.

 

이렇듯 카불의 교훈은 따로 있다.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스스로 비하해 상대의 오판을 초래하거나 정파적 이익을 위해 객관적 현실을 왜곡하고 국익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교훈 말이다. 그리고 동맹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먼저 자강을 고민해야 한다. 이는 상식이다. 다만 눈앞의 이익 때문에 상식을 외면하는 이들이 있어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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