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자 전두환 사망] 시민들 광주로, 광주로…“사과받지 못한 분함 위로드립니다”

● COREA 2021. 11. 22. 21:45 Posted by 시사 한겨레 ⓘ한마당 시사한매니져

국립 5·18묘지 시민들 추모 행렬 이어져

 

지난 24일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은 전남 영암 삼호고 학생들이 5·18 항쟁 이야기를 듣고 있다. 국립5·18민주묘지 관리사무소 제공

 

‘사과받지 못한 분함 위로드립니다.’

 

26일 오전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5·18묘지) 들머리에 놓인 방명록에 장아무개씨가 적은 추모의 글이다. 같은 날 서울에서 온 박아무개씨는 “80년 5월 5세였던 아이가 그 시절을 잊지 않습니다”라고 적었다. 지난 23일 전두환 사망 이후 5·18묘지를 찾은 추모객들은 방명록에 “끝까지 기억하겠습니다”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등을 남겼다. 시민들이 쓴 추모의 글엔 아무런 반성도 없이 사망한 전씨의 잘못을 꾸짖는 듯 오월 영령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들이 가득했다.

 

80년 5월, 5살이던 아이가 그 시절을 잊지 않습니다

 

이날 이른 아침인데도 추모객 세 팀이 5·18묘지를 찾았다. 전씨 사후 5·18묘지가 궁금해 친구 4명과 함께 온 김용주씨는 “아유, 사과 한마디 없이 죽었으니 참…. 한 나라를 통치했다는 사람의 마지막 몰골이 뭐요? 노태우처럼 사과 한마디라도 했어야지요”라고 했다. 경기도에서 왔다는 박아무개씨 부부도 이날 10대 두 아들과 여행을 하던 중 5·18묘지를 처음 찾았다고 했다.

 

지난 25일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들머리에 놓인 방명록에 적힌 추모의 글. 장아무개씨가 ‘사과받지 못한 분함 위로드립니다’라고 적은 글이 눈길을 모은다.

 

전씨 사후 학생들이나 단체로 찾는 추모객들이 늘고 있다. 지난 24일 이후 이날까지 영암 삼호고(130명), 홍농서초등학교(80명), 숭의과학기술고(30명) 등 학생들이 다녀갔고, 제주협동조합(40명), 우성지역아동센터(80명), 한국교수발전연구원(30명), 경기기자협회(15명) 등이 방문했다.

 

추모객들 “전두환 비석 어디 있습니까?”

 

특히 추모객들은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밟아 화제가 된 ‘전두환 비석’에 관심을 보였다. 이 비석은 원래 광주 인근 담양군의 한 마을에서 세운 전씨 부부 민박 기념비였다. 광주·전남민주동우회가 1989년 1월13일 망월동 5·18 옛 묘역 들머리로 옮겨와 “5월 영령의 영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짓밟아달라”(표지판)는 취지로 묻은 것이다. 국승진 국립5·18민주묘지 의전계장은 “참배객들이 5·18묘지를 둘러본 뒤 요즘 화제가 됐던 ‘비석’을 찾아 인근에 있는 5·18 옛 묘역으로 이동하는 분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김태훈(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 열사의 묘지.

 

5·18묘지엔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 918명이 안장돼 있다. 이날도 5·18 유공자 3명이 새로 묻혔다. “5·18에 원한도 없으려니와 작은 서운함들은 다 묻고 간다”며 떠난 이광영(68)씨, 군부독재로부터 강제해직 고통을 겪은 노희관(87) 전 전남대 명예교수, 그리고 강대웅(61)씨 등이다. 4묘역에 들어섰다.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친 뒤 도서관에서 투신한 김태훈 열사 묘지에 가을 햇살이 쏟아졌다. 비석의 날짜는 1981년 5월27일이다. 망월동 5·18 옛 묘역에도 58명의 넋이 묻혀 있다. ‘전두환’ 비석을 지나 1986년 4월 반외세·반독재 시위 중 숨진 이재호 열사의 묘지 앞에 섰다. 전두환·노태우 집권기인 1980~92년에 분신하거나 투신한 이만 47명으로 알려져 있다. 정대하 기자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자녀와 가족을 잃은 시민들이 설립한 사단법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제공

26일 아침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들머리에서 추모객들이 방명록에 추모의 글을 쓰고 있다.

                       광주 망월동 5·18 옛 묘역 들머리에 박혀 있는 전두환 비석.

 

영화에서도 실패한 ‘전두환 단죄’…광주 관객들 “쏴, 당겨”

 

전두환 본격 다룬 영화 적어, ‘26년’ ‘남산의 부장들’ 정도

이젠 새로운 전두환 영화 나올 때

 

영화 <26년> 속 전두환 모습. 청어람 제공

 

지난 40년간 한국영화가 전두환을 다룬 방식은 정면의 역사가 아니었다. 일종의 측면의 역사였으며 굴곡을 넘어 어느 정도는 굴종의 역사 서술방식이었다. 한 번도 전두환의 범죄 행위를, 그 극악한 반역과 반동의 행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그건 이 정치군인의 범죄가 역사적으로 정리가 돼 있지 않아서가 아니다. 현실 생활 속에 아직도 이들 무리를 지지하는 극우 집단들이 뿌리 깊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전후 세대인, 반공교육으로 세뇌된 일베 집단들의 난동과 방해, 협박이 일상 속에서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를 만드는 투자 제작자의 입장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여론이라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린치 행위다. 광주 학살이 사실은 북한군의 침투 해서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식의 주장이 여전히 버젓이 방송과 언론을 타고 있는 한 ‘용기 있는’ 영화가 나오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5.18 당시를 둘러싼 여러 의혹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상태다. ‘본격’ 전두환 영화는 좀 더 기다려야 할 판이다. 어떻게 보면 독재자 박정희의 본색을 그린 영화 역시 아직 제대로 나온 것이 없다. 예컨대 그의 만군 시절의 얘기 같은 것은 그려진 것이 없다.

 

영화 <택시운전사>. 더램프 제공

 

만약 전두환과 그의 1980년 12.12쿠데타를 제대로 다뤘다면 한국에도 진작에 <다운 폴>같은 독일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다운 폴>은 전쟁에서 패하기 직전 지하벙커에서 작전 회의를 하는 히틀러의 모습을 통해 파시즘의 광기가 얼마나 극악한 것인가를 웅변하는 작품이다. 브루노 간츠의 명연기로도 유명하며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그의 연기 모습이 많이 패러디되기도 했다.

 

지금껏 전두환을 비교적 정면에서든, 아니면 우회적으로든 묘사한 작품들이 있다면 그것은 대개 광주항쟁을 다룬 작품들이다. <화려한 휴가> <택시 운전사> <변호인> <1987> 등이지만 이들 영화에서 전두환은 묘사만 될 뿐 그 모습을 직접 드러내게 하지는 않는다. 전두환의 모습을 거의 처음, 희화시킨 영화는 <26년>이다. 1980년에서 26년이 지난 2006년 세명의 젊은이들이 의기투합해 독재자 전두환을 처단하려 한다는 얘기다.(정작 영화는 2012년에 개봉됐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간절히 원하고는 있지만 현실 세상은 결코 그럴 수 없게 하는 이야기, 곧 전두환 처단이 영화 속에서 진행된다.

 

영화 <변호인>. 위더스필름 제공

 

이 영화가 상영됐던 당시 광주의 한 극장에서는 영화 속 저격수(한혜진)가 멈칫멈칫 사격을 망설이는 장면에서 관객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쏴! 당겨!’라고 외치기도 했다. 영화의 열린 결말을 두고는 감독 조근현을 향해 불만을 터뜨리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전두환을 연기한 장광의 대사 만큼은 리얼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철통 경비를 뚫고 자신의 아방궁에 침투한 호남 조폭 곽진배(진구)에게 전두환은 결코 뉘우침이 없다.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너희들이 무엇을 아느냐는 식이다. 장광은 그런 식의 비아냥거리는 어투의 연기에 능하다. 원한을 품고 일차적으로 전두환을 암살하려 하는 김갑세(이경영)도 속절없이 그와 경호원들에게 당하고 만다. 지금 생각하면 거들먹거리는 영화 속 전두환의 모습은 실제로도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한다. <26년>은 그런 인물 묘사의 리얼함만으로도 평가되고 기억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속 전두환(오른쪽). 하이브미디어코프 제공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전두환의 저열한 인간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영화는 우민호 감독의 2020년작 <남산의 부장들>이다. 여기서 배우 서현우는 전두환의 대머리를 표현하기 위해 앞머리를 삭발하고 나온다. 영화 속에서 전두환은 거의 대사가 없는데, 10.26 직후의 밤을 묘사한 마지막 장면에서 전두환에 대한 인물평에 있어 영화는 화룡정점을 찍는다. 거기서 전두환은 박정희의 집무실 비밀 금고에서 돈을 훔친다. 카메라는 금고를 열면서 흘깃 눈치를 보는 전두환의 비열한 얼굴 표정을 담는다. 결국 전두환은 도둑놈이었음을, 저열한 절도범에 불과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박정희의 비자금은 물론이고 정권과 정부까지 훔친 장본인 전두환의 모습이 가장 적극적으로 그려진 셈이다.

 

어찌 보면 폭도의 우두머리 전두환과 그 일당들에 대한 영화는 아직 시작도 못 한 셈이다. 아직 할 얘기가 무궁무진하게 많다. 영화가 스스럼없이, 아무런 제약과 방해 없이 나올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1980년이라는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늘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게 한다. 전두환의 사망을 계기로 새로운 전두환 영화들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결국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등 916명, 국가 상대 940억원대 소송

 

지난 25일 오전 전두환씨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5공 피해자 11개 시민단체' 회원들이 사과 없이 죽음을 맞이한 전씨를 규탄하고, 재산을 피해자와 사회에 환원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와 가족 등 5·18 관련자 916명이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943억여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5·18구속부상자회는 회원 916명이 국가를 상대로 약 943억원의 위자료 지급을 구하는 소송을 26일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고 밝혔다. 소송은 모두 3건이다. △5·18유공자 본인과 유공자의 생존부모 등 882명이 913억여원을 구하는 소송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옥중 단식투쟁을 벌이다 숨진 고 박관현 열사 가족 9명이 제기한 17억원 규모 위자료 청구소송 △5·18민주유공자 유족 25명이 12억5천만원을 구하는 소송이다.

 

원고들은 “기존의 손해배상은 유공자와 가족 등의 정신적 손해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고 소송 이유를 밝혔다. 그동안 5‧18 관련자들은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5‧18보상법)에 따라 보상금을 받았는데, 여기에 정신적 손해배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 논란이 있었다. 이에 관련 조항을 심리한 헌법재판소는 지난 5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5·18 보상법에 근거해 보상금을 받았어도 정신적 손해에 대한 보상을 추가로 요구할 수 있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원고 법률대리를 맡은 법무법인 엘케이비(LKB)는 “5‧18 생존자 대부분이 장래 사회생활을 한창 준비해야 할 청년기였음에도 국가에 의한 부정적 낙인과 감시‧사찰로 현재까지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복귀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번 소송에 참여하지 못한 유공자 등에 대한 소송을 추가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5·18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의 국가배상 소송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5·18 당시 무력 진압으로 사망하거나 다치고, 유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와 가족 70여명을 대리해 지난 24일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조영선 변호사는 “그동안 피해자들이 받은 보상 또한 지나치게 낮거나 모욕적이었다.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통해 그 죄를 국가에 묻고자 한다”고 밝혔다. 신민정 기자

 

전두환 빈소 앞에 20살 청년은 묻는다 “왜 사과하지 않는가”

5·18 사죄는커녕…측근들 화내거나 침묵만

 

전두환씨 빈소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마련

5공 인사들 조문…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조화도

 

전두환씨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 안충원(20)씨.

 

23일 전두환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안충원(20)씨는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무작정 케이티엑스(KTX) 서울행 표를 끊었다. 그는 이날 오후 5시부터 전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안씨가 들고 온 스케치북에는 ‘반성하지 않는 자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안씨는 1980년 5월 계엄군에 희생된 대동고 3학년 전영진 열사의 이야기를 알게돼 5·18광주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광주에서 열린 전씨의 사자명예훼손 사건 재판을 방청해 직접 전씨의 모습도 봤다. 그는 “(재판에서) 꾸벅꾸벅 조는 전씨를 향해 한마디도 못한 것이 응어리가 졌는데 이렇게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고 했다. 안씨는 “(전씨가) 그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는데, 숨을 거두기 전에는 최소한이라도 사과의 메시지를 표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됐다”며 “(스케치북) 메시지는 전씨에게 전달되진 못하겠지만 그의 가족과 5공 실세가 보지 않겠나. 이 말은 꼭 전하고 싶어서 서울로 오게 됐다”고 말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71)씨도 이날 전씨의 장례식장 앞에서 열린 전두환심판국민행동본부의 기자회견에서 “12.12 군사쿠데타로 빚어진 참상과 사람들의 고통을 잊을 수 없다. (전씨의 죽음은) 황망하기 짝이 없다. 5·18 유가족들과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을 잊지 말아달라”며 “전두환의 사죄 없이 (그가) 숨진 것을 바라보는 이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태일 열사와 전태삼씨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는 1980년 군사정권 시절 반정부 시위에 참여해 계엄포고를 위반한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징역 1년을 확정판결을 받았다. 최근 검찰이 41년 만에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해 재판이 진행중이다.

 

이날 전씨의 빈소가 차려진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는 조문객들 발길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조문객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한 5공 시절 인사들로, 이들은 전씨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책임이나 전씨와의 관계를 묻는 취재진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빈소를 지켰다. 전씨의 연희동 자택에서부터 유족과 함께했던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과 ‘하나회’ 멤버인 고명승 전 3군사령관,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도 밤늦게까지 빈소를 지켰다.

 

12·12 군사반란을 이끈 신군부 일원 신윤희 전 육군헌병감과 박희도·김진영 전 육군참모총장 등 5공 인사들도 조문을 왔다. 박 전 총장은 취재진이 5·18 유족에게 사과할 생각 없느냐고 물었지만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또한 1988년 전씨가 백담사로 칩거했을 당시 주지스님이던 도후스님도 빈소를 찾았다. 현역 국회의원으로는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이 처음으로 조문을 왔다.

청와대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사과가 없었던 점은 유감”이라며 조화를 보내거나 조문 계획이 없다고 밝혔고, 여야 대선후보 4명도 조문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와 김기현·김도읍 의원 및 이명박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은 조화를 보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에스케이(SK) 그룹 회장, 노태우씨 부인 김옥숙씨,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과 중앙홀딩스 홍석현 회장, 김민배 <티브이(TV)조선> 대표이사가 보낸 조화와 함께 권영진 대구시장과 국민의힘 이성헌·박대출 의원이 보낸 근조기도 걸렸다. 장예지 고병찬 박지영 장현은 기자

 

5·18 사죄는커녕…측근들 화내거나 침묵만

전씨 측 "발포명령은 없었지만…'상처치유 책임' 사죄는 했다"

5·18 직접책임 묻자 취재진에 언성도… 장세동은 '답변 거부'

 

12·12 군사반란 주역들

 

23일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자택 앞에서 만난 옛 측근들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에 화를 내거나 침묵했다.

 

고인이 된 전씨와 정치적 고락을 함께한 이들이지만, 누구도 그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거나 사죄하는 이는 없었다. 도리어 취재진을 향해 언성을 높이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전두환 회고록' 집필에 관여한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이날 전 전 대통령 사망 직후 서울 연희동 자택 앞에서 약식 회견을 열었다. 전씨 최측근을 꼽히는 그는 일생을 가까이서 보필하며 언론 대응을 맡아 왔다.

 

민 전 비서관은 전씨가 '5·18 사죄가 없었다'고 기자들이 지적하자, "백담사 계실 때도, 여기 연희동에 돌아오신 뒤로도, 사찰에 가서도 기도와 백일기도 하시고 여러 차례 했는데 더 어떻게 하느냐"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사죄의 뜻을 밝힌 건 (전씨가) 대통령이 된 후 광주 사태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충분히 못 했기 때문에 그런 점에 대해서 유감스럽다는 말을 한 것이지, 발포 명령했다고 사죄하는 게 아니다"라며 "발포 명령은 없었다"는 주장을 이어갔다.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 찾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한 2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으로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이 들어서고 있다.

 

'사망 전 5·18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남긴 말이 없었냐'는 질문에는 "형사소송법에도 죄를 물으려면 시간 장소를 구체적으로 특정해서 물으라고 돼 있는데 그냥 막연하게 사죄하라는 건 옛날 원님이 사람 붙잡아 놓고 '네 죄를 네가 알 터이니 이실직고하라'는 것 아닌가.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전씨의 '복심'이자 '5공 2인자'로 불렸던 장세동 전 안전기획부장은 침묵을 택했다.

 

오후 연희동 전씨 자택을 다녀간 그는 취재진이 '5·18 당시 발포명령이 없었다'는 입장인지를 물었지만 답변하지 않았다. 다만 고인 사망에 대한 소회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모든 사람이 느끼는 바대로"라고 했다.

 

장 전 안기부장은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으로 12·12군사반란에 가담했으며 대통령 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안기부장에서 물러났으며, 노태우 정권 때는 국회 5공 청문회에 출석해 전씨와 관련한 추궁에도 끝까지 입을 닫았다. 이후 5공 비리에 연루된 혐의 등으로 여러 차례 옥살이를 했다.

 

5·18조사위 “전씨 사망 아쉽지만 진상규명은 계속”

9월부터 전씨 등 신군부 인물 대면조사 추진

 

올해 5월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관들이 5·18 민주화운동 민간인 희생자 검시에 참여했던 관계자로부터 당시 상황을 듣고 있다. 5·18조사위 제공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조사위)는 전두환(90)씨의 사망에 아쉽다는 입장과 함께 신군부 출신 인사들의 고백을 촉구했다.

 

23일 5·18조사위는 성명을 내어 “전두환씨의 사망에 대해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고인은 지난 41년간 피해자와 국민 앞에 진실을 밝히고 사죄할 기회가 있었으나 변명과 부인으로 일관해 5·18 희생자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며 “우리는 전씨를 포함한 신군부 핵심인물들에게 조사안내서와 출석요구서를 발송했지만 전씨는 지병을 이유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이들은 “전씨는 사망했지만 법률이 부여한 권한과 책임에 따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지속해 나가겠다. 신군부 핵심인물들은 더 늦기 전에 국민과 역사 앞에 진실을 고백할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5·18조사위는 5·18 당시 발포명령자 등을 규명하기 위해 2019년 12월부터 활동하고 있다. 5·18조사위는 지난 9월부터 전두환, 노태우, 이희성 5·18 당시 계엄사령관, 황영시 육군 참모차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 신군부 핵심인물 5명을 대상으로 대면조사를 추진했다. 김용희 기자

  

전두환 유언 “화장해달라”…임종 지킨 사람 없었다

 

측근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

“‘죽으면 화장해 그냥 뿌리라’ 말씀”

 

12·12 군사쿠데타 주역이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씨가 사망한 23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씨의 자택 앞에서 전씨의 측근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3일 사망한 전두환씨가 “화장해달라”고 유언을 남겨 유족들도 이에 따를 것으로 보인다.

 

이날 오전 11시께 전씨 측근인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씨 자택 앞에서 “(전두환씨가) 나 죽으면 화장해서 그냥 뿌리라는 말씀을 했다. 가족들은 유언에 따라서 그대로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민씨는 “(전씨가) 이날 아침 8시45분께 자택에서 화장실을 가던 길에 쓰러졌고, 임종을 지킨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민씨는 이어 “(집에는) 이순자 여사만 계셨는데 미처 연락할 틈도 없이 그냥 갑자기 운명하셨기 때문에 아무런 응급처치도 못 하시고 그냥 돌아가셨다”고 했다.

 

전씨의 유언과 관련해 민씨는 자신이 쓴 책 <전두환 회고록> 3권 643쪽을 인용했다. “문득 내 가슴속에 평생을 지녀온 염원과 작은 소망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 저 반민족적, 반역사적, 반문명적 집단인 김일성 왕조가 무너지고 조국이 통일되는 감격을 맞이하는 일이다. 그날이 가까이 왔음을 느낀다. 건강한 눈으로, 맑은 정신으로 통일을 이룬 빛나는 조국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 전에 내 생이 끝난다면, 북녘땅이 바라다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있으면서 기어이 통일의 그날을 맞고 싶다”는 내용이 담긴 부분이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이날 전씨에 대해 “내란죄 등의 실형을 받아 국립묘지법상 국립묘지 안장 배제 대상”이라고 밝혔다. 박수지 박강수 박지영 권혁철 기자

 

전두환 미납 추징금 956억원·세금 10억…결국 받아낼 길 없나?

총 추징금 2205억원 중 43% 남아

검찰 “추가 환수 집행 법리 검토중”

 

전두환 씨.

 

12·12 군사반란 주역이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씨가 23일 사망하면서 남은 추징금 약 956억에 대한 환수가 더 어려워졌다. 검찰은 전씨가 사망 전에 숨긴 재산이나 가족 명의 차명 재산을 환수할 방법이 있는지를 검토하고 있다. 전씨는 지방세도 9억8200여만원도 미납한 것으로 나타났다.

 

23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전씨는 추징금 2205억원 가운데 956억원을 내지 않은 상태다. 지금까지 집행된 추징금액은 전체의 57%인 1249억원 수준이다. 1997년 전씨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함께 2205억원의 추징금 확정판결을 받은 바 있다.

 

검찰은 올해 들어 추징금 14억원을 집행했다. 검찰은 지난 7월 전씨 장남 전재국씨가 운영하는 출판사 시공사를 상대로 3억5천만원을, 8월에는 전씨 일가가 소유한 선산 등을 공매해 10억여원을 회수했다.

 

그러나 전씨 사망으로 추징금 환수가 불투명해졌다. 추징금은 당사자가 아닌 가족 등 타인에게 양도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불법 재산인 것을 알고도 취득한 제3자로부터 추징이 가능하다. 전씨 추징금 환수 집행을 담당해온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부장 유진승)는 이날 “당사자가 사망했지만 추가 환수 여부 등에 대해 단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미납추징금 집행이 가능한지 등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6월 유기홍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전씨 사망 뒤에도 상속재산에 대해 추징할 수 있도록 하는 ‘전두환 재산 추징 3법’을 대표 발의했으나 아직 법사위에 계류 중인 상태다. 당시 유 의원은 형법·형사소송법 등 개정 등을 통해 추징 판결을 받은 자가 사망한 경우에도 상속재산에 대해 추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앞서 전씨는 2003년 미납추징금 추징 시효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오자 추징금 314억원만 납부했다. 이후 검찰은 2003년 재산명시를 신청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전씨는 당시 29만1천원의 예금과 채권 등을 재산목록으로 제출한 바 있다. 이후 추징금 집행 시효 만료를 앞둔 2013년 ‘범인 이외의 제삼자가 정황을 알면서도 취득한 불법재산과 그로부터 유래한 재산은 검사가 추징을 집행할 수 있도록’ 한 이른바 ‘전두환 추징법’(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이 개정돼 시효가 3년에서 10년으로 연장됐고, 검찰은 미납추징금 특별환수팀을 꾸려 전씨 재산 환수 절차에 나섰다.

 

서울중앙지검은 2013년 7월 특별환수팀을 만들어 압류와 공매 등 방식으로 전씨 주변 재산 환수에 나섰다. 장남 전재국씨는 미납추징금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일자, 그해 9월 검찰에 미납추징금 1672억원의 자진 납부 계획서를 제출하며 “(서울 연희동 집도) 전씨의 실소유 재산임을 모두 인정하고 환수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씨 쪽은 이후 돌연 태도를 바꿨다. 검찰이 2017년과 2018년 두 차례 전재국씨를 만나 연희동 집을 어떻게 할 것인지 묻자, 그는 기부채납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검찰이 공매 절차를 진행하자, 2018년 12월 전씨 쪽은 법원에 ‘재판 집행에 관한 이의신청’을 내며 저항했다. 연희동 자택 본채는 부인 이순자씨, 정원은 전씨의 전 비서인 이택수씨, 별채는 셋째 며느리 이윤혜씨 명의라는 이유에서다. 전씨 쪽은 재판 진행 중 ‘전두환 추징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하기도 했다. 이에 대법원은 지난 4월 “연희동 자택 본채와 정원에 대한 압류처분은 위법하고, 별채에 대한 압류처분은 적법하다”고 각각 결정했다. 본채와 정원은 전씨가 대통령 취임 전에 취득해 불법수익으로 형성됐다고 볼 증거가 부족해 압류할 수 없지만, 별채는 불법재산으로 취득한 게 맞아 압류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헌재도 지난해 2월 ‘전두환 추징법’은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이와 별개로 며느리 이씨는 2018년 10월 서울중앙지검을 상대로 ‘별채 압류처분 무효 소송’을 내기도 했지만, 1심과 2심은 모두 “압류처분은 적법하다”며 패소 판결했다. 이 사건은 지금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전씨는 9억8200만원 상당의 지방세도 미납한 상황이다. 그는 8년째 서울시 고액 체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서울시는 2018년 압류한 물품을 우선 공매 처분할 예정이다. 서울시는 그해 12월 연희동 전씨 자택을 수색해 티브이(TV), 냉장고, 병풍 등 가전·가구류와 그림 등 모두 9점을 압류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압류 물품을 공매한 뒤 숨겨진 재산이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이어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압류 물품 공매 뒤 5년 안에 다른 재산을 찾지 못하면 징수권이 소멸한다. 서울시는 2017년 8월에는 전씨 회고록 저작권 사용료를 압류한 바 있다. 손현수 전광준 기자

 

청와대 “전두환 조문도, 조화도, 장례지원도 없다”

박경미 대변인 “진실 안 밝히고 사과 없었던 점 유감”

북방정책 등 평가·조문·조화 있었던 노태우 사망때와 차등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23일 춘추관 브리핑룸에서 전두환씨 사망 관련 브리핑을 열고 조문 조화 계획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전두환씨 빈소를 찾아 조문을 하거나 조화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 청와대는 유족들이 가족장으로 치를 뜻을 밝혔다며 정부 차원의 장례 지원도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23일 오후 브리핑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며 “끝내 역사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진정성 있는 사과가 없었던 점에 유감 표한다. 청와대 차원의 조문과 조화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이날 브리핑에서 전씨는 ‘전 대통령’이라고 지칭됐지만, “예우가 박탈된 것이지 전직 대통령이 아니었다는 건 아니다.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청와대 쪽은 설명했다.

 

청와대가 조문·조화 등 의전을 생략하기로 한 것은 전씨가 5·18 발포 책임을 부정하는 등 진상규명에 협조하지 않았고 추징금을 납부하지도 않았으며, 회고록을 통해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하는 등 과거의 잘못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은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내란·군사반란의 수괴로 헌정을 유린한 사람을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예우할 순 없다는 내부 분위기도 강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브리핑에 대통령의 뜻이 담겨 있다”며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 진상규명에 협조하지 않았고 진정성 있는 사과 없었다는 점에 유감 표한다고 했는데 그 부분에 주목해달라”고 했다. 반성하지 않은 전씨의 죽음을 추모할 수 없다는 게 문 대통령의 뜻이라는 설명이다.

 

청와대는 이날 한국을 국빈방문한 코스타리카의 카를로스 알바라도 케사다 대통령과 문 대통령의 정상회담 뒤인 오후 2시반께 참모회의를 열어 이런 방침을 정했다. 앞서 청와대는 노태우씨 사망 당시에는 5·18 강제 진압과 12·12 쿠데타, 88올림픽과 북방정책,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의 공과를 짚으며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는 문 대통령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문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고 유영민 비서실장과 이철희 정무수석이 빈소를 찾았다. 이번에는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족을 위로한다’는 메시지를 대변인 명의로 발표하는 방식으로 전·노씨 죽음에 명확하게 차등을 뒀다.

 

국가장이나 국립묘지 안장도 정리됐다. 전씨 측근인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씨 자택 앞에서 전씨의 유언 형식으로 화장과 가족장 방침을 전했다. 유족들이 가족장을 치르기로 희망하는 만큼 국가장에 따른 장례 지원은 논의도 필요 없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앞서 이철희 수석은 ‘노태우 국가장’으로 논란이 일자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가장이나 국립묘지 안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며 가능성을 일축한 바 있다. 이완 기자

 

끝나지 않은 이 피울음, 끝까지 사죄는 없었다

 

암흑의 현대사 쓴 전두환 사망

광주 학살·군부독재 폭압…야만의 역사

한점 참회도 없이 떠나 “왜 그에게 책임을 묻나”

전두환쪽은 마지막까지 고통과 모멸감 안겨

 

1980년 5월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은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결코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당시 희생자들이 묻혔던 망월동 옛묘역에서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가 오열하고 있다. 나경택(5·18기념재단) 제공

 

끝내 반성도 사과도 없는 마지막이었다. 그의 죽음을 알린 측근은 1980년 5월 광주학살 책임을 왜 그에게 묻느냐고 따졌고, 1980년대를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은 또 한번 고통과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

 

12·12 군사반란 주역이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씨가 23일 사망했다. 향년 90. 지난달 26일 노태우씨에 이어 전씨까지 사망하면서 1961년 5·16 군사반란,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 반공보수기득권 연합의 짙은 그림자를 남긴 군사독재의 주요 인물이 모두 세상을 떴다.

 

1931년 1월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난 전씨는 대구공고를 졸업하고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1955년 육사 11기로 소위 임관했다. 전씨는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이 5·16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박 소장을 찾아가 ‘육사 생도들을 동원해 쿠데타 지지 시가 행진을 하겠다’고 건의해 신임을 얻는다. 이후 1974년 육사 11기 최초로 준장에 진급한 뒤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1976년), 국군보안사령관(1979년) 등 요직을 맡는다.

 

그는 육사생도 시절 노태우 등 육사 11기 5명과 오성회라는 모임을 만들었고, 이는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로 발전한다. 전씨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숨지자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뒤, 하나회 세력을 중심으로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이듬해 5월17일 시국수습 명목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이에 반발한 광주시민들을 유혈 진압했다. 전씨는 2017년 회고록 등을 통해 당시 발포 명령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1980년 8월 ‘체육관 선거’로 불린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 선거릅 통해 11대 대통령에 취임한 뒤, 헌법 개정을 거쳐 이듬해 2월 제5공화국 12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전씨가 이끈 신군부 세력은 군홧발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밟았다. 언론통폐합을 통한 보도통제를 했고, ‘사회정화’ 이름 아래 삼청교육대·형제복지원 등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끌려가 다치고 죽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 요구가 폭발했지만, 전씨는 대통령 간선제로 차기 대통령을 뽑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결국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며 5공화국 몰락으로 이어졌다.

 

 

친구 노태우씨를 후계자 삼아 권력을 휘두르려 했던 전씨는 1988년 여소야대 정국에서 5공 비리 및 광주학살 진상조사를 받게 된다. 1988년 11월23일 전씨는 대국민 사과와 연희동 집 등 국가 반납을 발표한 뒤 부인 이순자와 함께 백담사로 들어가며 처벌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12·12 군사반란 및 5·18 유혈 진압에 대한 수사·재수사가 진행됐고, 결국 1995년 12월 반란수괴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다. 이듬해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지만,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이 확정됐다. 그해 12월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그의 특별사면을 합의한 뒤 석방한다.

 

그는 눈을 감기 전까지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국가폭력 피해자 등에게 사죄하거나 참회하지 않았다. 대신 죽기 전까지도 광주의 법정에 서야했다. 2017년 낸 회고록에서 5·18 당시 계엄군 헬기 사격을 두고 고 조비오 신부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그는, 지난해 11월 광주지법에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알츠하이머 등 건강 문제를 들어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던 그는 재판이 열리는 날 골프장에서 목격되기도 했다.

 

전씨 측근인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이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씨 집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아침 8시45분께 자택에서 화장실을 가던 중 쓰러졌다. 임종을 지킨 사람은 없었다. (집에는) 이순자 여사만 계셨다”고 전했다. 전씨의 주검은 오후 2시50분 수많은 시위대가 진입을 시도했던 연희동 집을 떠나 빈소가 마련된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주요 외신은 “한국에서 가장 비난 받는 군사독재자가 죽었다”(<뉴욕타임스>)고 전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를 예정이다. 발인은 27일 오전이다. 유족들은 전씨를 화장한 뒤 휴전선 근처에 안장하길 희망한다고 한다. 유족은 아내 이순자씨, 아들 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가 있다. 이승준 박지영 기자

 

“악마 전두환, 당당하게 살다 죽다니” 형제복지원 생존자의 분노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이향직씨 인터뷰

“사과 없는 악행 반복되면 피해자 또 생긴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 모임 한종선 대표.

 

“악마 같은 짓을 해놓고 사과 한마디 없이 당당하게 살다 죽으니 화가 납니다.”

 

전두환씨가 사망한 23일,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 모임 한종선 대표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씨는 “잘못에 대해 사과하지 않아도 자기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고착화되면, 누구든 잘못을 저질러도 사과를 안 하게 될 것”이라며 “나쁜 놈들이 모방하고 답습할 예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날 또 다른 피해자인 이향직 형제복지원 서울경기 피해자협의회 대표도 “박정희, 전두환 두 전 대통령은 형제복지원 사건의 교사범과 마찬가지”라며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기만 하고, 이렇게 반성 없이 가버렸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1987년 부산 사회복지시설 형제복지원에서 부랑자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아동과 장애인, 노숙인 등을 감금해 강제노역과 학대 등을 자행한 사건이다.

 

피해자들은 이날 전씨의 측근인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의 5·18광주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발언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이날 민 전 비서관은 5·18 유혈 진압에 대해 전씨가 사과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질문에 “여러 차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과를) 하셨다”며 “발포 명령을 하신 거 아니냐, 거기에 대해서 사죄하라 그런 뜻 아닌가. 그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한씨는 “사과라는 걸 해본 적이 없어 그런 말을 한다”며 “전두환을 잘 보낼 거면 측근들이 잘 얘기해야 하는데, 죗값만 더 늘어난다”고 말했다.

 

한씨는 “이렇게 사과 없는 악행이 반복된다면 우리 같은 피해자들은 또 만들어진다”며 “과거사위의 역할은 죽은 자라 할지라도 그 기록을 철저히 남기고 무게를 죽어서도 짊어지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5월 형제복지원 사건을 1호 사건으로 조사하고 있다. 장현은 기자

 

노태우·전두환…현대사의 그림자 사라지는 연희동

 

전두환씨의 주검이 23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빈소인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기 위해 운구차로 옮겨졌다. 아들인 전재용(맨오른쪽)씨가 인사하고 있다.

 

“노태우씨는 그 아들이라도 (5·18에 대한) 사과를 했었는데, (전씨는) 지금까지 사과를 안 한게 좀 그래요. 가시는 데 그런 것 좀 정리하고 가셨으면…. 어제 오늘 바람이 매서웠는데 이 사람(전씨)은 가야 하는데, 저 세상에 들어가려니 광주의 영혼들이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60대 중반 박아무개씨는 23일 전두환씨 자택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연희동은 노태우·전두환씨 대통령을 지낸 두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연희동 골목은 5·18 단체들의 집회와 1995년 12월 자신의 수사에 대해 반발한 전씨의 ‘골목성명’ 등으로 몸살을 앓기도 했다. 이날 아침 8시45분 전씨가 사망하며 연희동에 깃든 현대사의 그림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이날 오후 전씨의 빈소가 마련되기 전까지 연희동 자택 앞에는 그를 찾은 시민들과 취재진, 경찰 차량 등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아침 일찍 전씨의 측근인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이 자택을 찾았고, 전씨의 12·12 군사반란 조력자이자 ‘5공 2인자’로 불린 장세동 전 안전기획부장과 오일랑 전 청와대 경호실 안전처장, 고명승 전 3군사령관 등도 소식을 듣고 연희동을 찾았다. 장 전 부장은 취재진의 질문에 “모른다”고만 하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고 전 사령관은 “한 어른이 가셨다.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나”라고 말한 뒤 전씨의 자택으로 들어갔다.

 

전두환씨가 사망한 23일 서울 마포구 세브란스병원 신촌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 앞 전광판에 전씨의 사진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빈소를 마련하기로 했지만 병원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해 방역 절차를 밟는 것이 늦어지면서, 전씨의 부인 이순자씨와 장남 전재국씨, 차남 전재용씨가 오후 내내 자택을 지켰다. 미국에 체류 중인 삼남 재만씨는 귀국 예정이다. 주검은 오후 2시50분께 병원으로 이동했다.

 

한편, 민 전 비서관은 이날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에 대해 전씨가 끝내 사과하지 않은 문제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여러차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과를) 하셨다”며 “(5·18) 당시 전 전 대통령이 공수부대를 배후에서 사실상 지휘했고 그래서 사실상 발포 명령을 하신 거 아니냐, 거기에 대해 사죄하라는 뜻 아닌가. 그건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희생자들에 대한 유감의 뜻은 밝히더라도 전씨의 직접적인 잘못은 없었다는 취지의 발언이다. 그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5·18광주민주화 운동) 그 후 대통령이 되셨다. 광주 사태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을 충분히 못 하셨기 때문에 그런 점에 대해서 ‘유감스럽다’ 그런 말씀을 한 것이다. 전 대통령이 무슨 발포 명령을 했기 때문에 그 발포 명령에 대해서 사죄하는 그런 뜻은 아니다”고 말했다. 장예지 고병찬 박강수 장현은 기자

 

광주학살 뒤 ‘계속된 가해’ 41년…사과도 처벌도 없이 갔다

[광주와 악연 전두환 사망]

두번 대통령 취임 때마다 광주 찾아와

“타지역보다 더 모범적이 되라” 훈시도

비석은 옛5·18묘역서 30년동안 밟혀와

 

전두환씨가 1980년 9월 5일 광주 옛 전남도청 청사를 방문해 브리핑을 듣고 있다. 전남도청은 1980년 5월 시민군의 저항 거점이었다. 국가기록원 사진 갈무리

 

23일 사망한 전두환씨와 광주의 악연은 40년간 이어졌다.

 

전씨가 주도하던 신군부 진압으로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희생된 민간인은 155명, 다쳤다가 사망한 시민(상이 후 사망자)은 110명이다. 또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 2461명, 연행구금부상자 1145명, 연행·구금자 1447명, 기타 118명 등 5517명이 신군부의 폭력으로 큰 피해를 봤다. 12·12 및 5·18 재판에서 무고한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는 이유로 내란목적살인죄가 확정된 피고인은 보안사령관이었던 전씨 등 5명이다. 전씨는 1997년 4월17일 대법원에서 반란(내란)수괴·내란·내란목적살인 등 13가지의 죄목이 모두 유죄로 확정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사면 복권됐다.

 

 광주시 북구 망월동 옛 5·18 묘지 들머리 땅에 박혀 있는 전두환씨 부부 민박기념비. 전씨 부부가 1982년 3월 광주에 오지 못하고 인근 전남 담양에서 숙박하고 세운 비다. 1989년 1월 광주전남민주동우회가 망월동 묘지 앞에 묻었다.

 

법적 처벌을 받고도 전씨는 당당하기만 했다. 2017년 4월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에서 5·18에 대해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발포 명령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한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는 허위다. 대법원은 1980년 5월27일 광주재진입작전(상무충정작전)의 살상행위를 내란목적살인죄의 유죄 근거로 판단했다. 전씨를 포함한 피고인들이 5월27일 0시1분 이후에 실시하기로 최종 결정해 27일 새벽 특공조 부대원들이 총격을 가해 18명을 사망하게 한 살상행위를 저질렀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1심과 달리 법원은 2·3심에선 증거 부족을 이유로 5월27일 광주재진입작전만 내란목적살인죄 범위로 봤고, 5월27일 이외의 살상행위는 내란을 실행하는 폭동 과정에서 발생한 범죄로 판단했다.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 직후 노먼 소프 기자가 촬영한 안종필(앞)과 문재학군의 주검. 문군은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옛 전남도청복원추진단(복원단)이 지난 5~7월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을 맞아 옛 전남도청 별관 2층에서 연 노먼 소프(Norman Knute Thorpe) 전에서 공개된 사진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과정에서 ‘발포명령’은 있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피고인들이 전남도청 등을 장악하려면 무장시위대를 제압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교전이 불가피해 사상자가 생기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작전을 강행하도록 명령했다”며 “그와 같은 살인 행위를 지시 내지 용인하는 의사가 있었음이 분명하고, 그 실시 명령에는 그 작전의 범위 내에서는 사람을 살해하여도 좋다는 ‘발포 명령’이 들어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판시했다. 전씨는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광주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해 사람을 살상한 폭동 행위도 내란죄 유죄 판결을 받았다.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전두환씨가 전 대통령이 1980년 9월 5일 광주 옛 전남도청 청사를 방문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사진 갈무리

 

전씨가 광주 재판정에 선 것은 광주학살 38년만인 2018년 5월3일이다. 전해 펴낸 회고록에서 계엄군의 헬기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몬시뇰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표현해 조 신부 등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기 때문이다. 전씨는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항소해 29일 결심공판 앞두고 있었다.

 

전씨는 대통령 재임 때 광주를 찾았지만, 환영받지 못했다. 전씨는 1980년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선거인 이른바 ‘체육관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뒤 첫 방문지로 호남을 선택했다. 9월5일 전남도청 청사를 방문한 전씨는 “국민들의 단합된 노력으로 해결되어 만족스럽다. 이제 더는 광주사태를 논의하면 안된다”고 ‘훈계’해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전씨는 이 자리에서 “이 지역이 명예와 자존심을 되찾고 타 지역보다 더 모범적이 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7년 단임제’ 개헌 뒤 이듬해 1월 간접선거로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광주를 찾았다. 2월18일 그가 광주를 방문한 날, 광주항쟁구속자가족회 가족들은 당시 광주와이엠시에이(YMCA) 앞에서 시위를 펼쳤다. 현장에서 정현애(전 오월머니집 관장)씨 등 5·18항쟁 참여자들과 가족들은 “광주의 구속자를 풀어달라”고 외쳤다. 앞서 1980년 10월25일 계엄사 1심 군사재판에선 5·18 관련자 5명에게 사형이, 7명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이외에 163명이 징역형을 80명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전씨는 1982년 3월10일 또 한차례 광주를 찾았지만, 광주에서 숙박하지 못했다. 전씨 부부가 당시 광주 인근 담양군 고서면 성산마을에서 1박을 하고 간 뒤, 마을유지 등이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광주·전남민주동우회는 1989년 1월13일 민박 기념비를 옮겨와 부순 뒤 5·18 영령들이 묻힌 망월동 묘지로 가는 들머리에 묻었다. 비석 옆 안내문엔 “5월 영령의 원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이 비석을 짓밟아 달라”고 적혀 있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밟았다는 ‘전두환 비석’이 바로 이 비석이다. 정대하 김용희 기자

 

학살자 전두환, 90수 누리고 반성 없이 죽다

전두환 전 대통령, 23일 연희동 자택서 지병으로 사망

군사 쿠데타로 집권…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지난 8월9일 광주에서 열린 항소심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연희동 자택을 나서는 전 전 대통령. 연합뉴스

 

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씨가 23일 사망했다. 향년 90세.

 

지병을 앓아온 전씨는 이날 오전 8시 40분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숨졌다.

 

그는 자택 내에서 쓰러져 오전 8시 55분께 경찰과 소방에 신고됐으며 경찰은 오전 9시 12분께 사망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파악됐다.

 

시신은 연대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됐다.

 

한편, 지난달 26일 12·12 군사 쿠데타 동지 관계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한 데 이어 한 달도 되지 않아 전 전 대통령도 세상을 떠났다.

 

1931년 1월 23일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난 전씨는 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한 뒤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만들고 무인'(武人)으로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이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데 이어 정권 찬탈을 위한 '12·12 군사반란'을 획책했다.

 

군사 반란을 통해 집권한 전씨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했으며 1988년 초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퇴임 후 내란과 살인 등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19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 공식 발표하는 민정기 전 비서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한 2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입구에서 민정기 전 비서관이 사망을 공식 발표하고 있다.

 

학살자 전두환, 반성 없이 죽다

23일 오전 연희동 자택서 사망

 

참혹했던 1980년대, 군부독재와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던 전두환이 23일 사망했다. 수십년간 치유받지 못한 역사의 상처 앞에서도 마지막까지 사죄와 참회는 없었다.

 

육사 11기, 박정희 신임 얻어 하나회

 

경남 합천군 율곡면에서 태어난 전두환은 대구공고를 졸업하고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55년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제25보병사단에서 소대장으로 첫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59년에는 미국 특수전 파견 교육 장교로 선발됐고, 이어 제1공수특전단 본부에 배치됐다. ‘정치 군인’의 면모가 드러난 때도 이때부터다. 그는 육사 2기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기인 이규동의 딸 이순자와 1959년 결혼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때 서울대 학군단(ROTC) 교관으로 일했던 그는 육사 후배들을 설득해 군부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하게 했고 이 사건으로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 자리에 앉았다. 이후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일을 도맡아 하면서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등을 지냈다. 1969년엔 육사 동기 중 최초로 대령에 진급해 1970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1974년 육사 11기 최초로 정식 준장에 진급해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제1보병사단 사단장 등 요직을 맡았다. 1979년에는 국군 보안사령관이 됐다. ‘하나회’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 육사 11기 주축으로 비밀리에 결성됐다. 박정희 친위 세력으로 역할을 하며 영향력을 키웠고 10·26 사건으로 정국이 혼란하던 틈에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12와 5·18…대통령 셀프 당선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전두환은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수사를 맡았다. 그해 12월12일, 전두환이 주축이 된 하나회는 군사반란을 일으켜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를 연행하고 군을 장악했다. 1980년 5월17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인사들은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국회 폐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의 조처를 내리고 학생·정치인·재야인사 등 2699명을 구금했다. 이에 맞선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 한 사람은 전두환이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가 2005년 집계한 통계를 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이다. 이 사건으로 그에겐 ‘학살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신군부’에 밀려 최규하 대통령이 직에서 물러나자, 전두환은 그해 8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취임 뒤 정당해산령을 내리고 1980년 10월27일 ‘7년 단임 대통령제’가 담긴 새 헌법을 공포했다. 1981년 민주정의당에 입당했고, 새 헌법에 따라 간접선거 방식으로 1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6년 1월 15일 서울 가락동 중앙정치연수원에서 당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표위원 등 당직자, 소속 의원, 당원, 각계인사 1천7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민정당 창당 5주년 기념식에서 전두환씨 부부가 당원들의 환호에 박수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한층 거세졌다. 저금리·저유가·저달러 경제 흐름 속에서 당시 한국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누리면서 새 정치에 대한 갈망은 표출되기 시작했다. 1985년 12대 총선을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요구가 터져 나왔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지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럼에도 그해 4월,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체육관 선거’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는 오히려 국민적 반발을 불러오며 5공화국의 몰락의 시초가 된다. 이 조처에 반발하는 국민들이 전국 각지에서 시위를 벌였고 결국 6월29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는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후계자로 세우고 퇴임 뒤에도 민정당 총재로 남아 막후 권력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노태우가 집권한 뒤 ‘여소야대’ 국회에서 5공화국 비리와 5·18민주화운동 진상조사를 위한 목소리가 들끓었다. 권력을 넘겨받은 친구이자 육사 동기 노태우도 그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1988년 11월23일, 전두환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한 뒤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내설악 백담사로 들어갔다.

 

퇴임과 구속, "전 재산 29만원"

 

3당 합당 뒤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중반인 1995년 말 전두환과 노태우를 전격 구속했다. 죄목은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 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등이다.

 

이 과정에서도 전두환은 “(12·12와 5·18)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최선을 노력을 다했으나 정부가 정치적인 이유로 특별법까지 제정해 재조사한다니 응할 이유가 없다. 법을 존중하기 위해 사법부의 조처만 수용할 것”이라는 골목 성명을 연희동 자택 앞에서 발표했다. 현충원을 5분 참배한 뒤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갔다.

 

1995년 12월 2일 자택 앞 골목에서 전씨가 검찰 소환 방침을 정면 반박하는 2쪽 분량의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 전씨는 이후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버티다가 체포돼 구속되었다. 연합뉴스

 

전두환은 1심에서 반란 수괴와 부패 혐의로 거액의 추징금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고,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검찰은 처벌이 약하다며 상고했지만 1997년 4월 대법원은 전두환에게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한 서울고법 판결을 확정했다. 15대 대선 유세에서 김대중·이회창·이인제 후보 모두 전두환의 사면복권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고, 15대 대선 이틀 뒤인 1997년 12월20일 김영삼 대통령이 사면 복권했지만 추징금은 전부 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970억원(2021년 기준)을 미납했고, 추징시효는 2013년 10월로 이미 7년 기한을 넘겼다.

 

피고인 전두환씨(오른쪽부터)가 노태우 전대통령,유학성 전중앙정보부장과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12.12. 및 5.18사건 선고공판에서 기립해 있다. 연합뉴스

 

그는 전 재산이 29만1000원이라고 밝히며 또다시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전두환은 2003년 4월28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추징금 환수를 위한 재산 명시 관련 재판에서 “기업한테서 뇌물을 받은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게 받은 돈을 민정당 관리 등 정치활동에 다 써서 남은 게 없다”며 해당 금액이 적힌 예금과 채권 증서를 제출했다. 그가 제출한 재산 목록에는 진돗개, 피아노, 그림, 병풍, 응접세트, 카펫, 에어컨, 텔레비전, 냉장고, 시계, 도자기, 컴퓨터, 식탁세트 등도 적혀 있었다. 출소 후에도 그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살면서 경호를 받고, 골프를 치러 놀러 다니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사자명예훼손으로 23년 만에 다시 법정에

 

말년에도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2017년 전두환은 3권짜리 회고록을 내놨다. 법원은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된 내용이 담겨있는 1권을 판매 금지 처분을 내렸고 대통령 시절이 담긴 2권과 개인사가 담긴 3권만 판매를 허가했다. 출판사는 이후 문제가 된 부분을 지우기만 한 수정본을 내놓기도 했다. 회고록에서 그는 고 조비오 신부의 ‘헬기 사격 목격 증언’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며 조 신부를 향해 ‘가면을 쓴 사탄’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조 신부의 유족은 전두환을 사자명예훼손죄 혐의로 고소했다.

 

전두환은 2019년 3월 11일 경찰 경호팀의 호위를 받으며 퇴임 뒤 23년 만에 피고인 신분으로 다시 법정에 섰다. 그는 “내가 알고 있기로는 당시에 헬기에서 사격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부인하면서 불성실한 태도로 임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1심에선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검찰과 전두환 쪽이 모두 항소하면서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었다. 2021년 8월에는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을 진단받고 부쩍 수척해진 모습으로 공식 석상에 나타났다. 김미나 기자

 

 

이재명 “학살의 주범 전두환씨, 마지막까지 반성 없었다”

“대통령 예우 박탈, 전두환씨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디지털 대전환’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23일 사망한 전두환씨에 대해 “최하 수백명을 살상했던, 자신의 사적 욕망을 위해 국가권력을 찬탈했던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에 대해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에게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 후보는 이날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디지털 대전환 공약을 발표한 뒤 기자들과 만나 “대통령 예우는 박탈 당했으니까 전두환씨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며 “전두환씨는 명백하게 확인된 것처럼 내란학살 사건의 주범”이라며 이렇게 밝혔다.

 

이 후보는 “(전씨는) 중대 범죄 행위를 인정하지도 않았다”며 “참으로 아쉽게 생각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미완 상태인 광주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이 드러날 수 있게 당시 사건 관련자들의 양심선언을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조문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현재 상태로는 아직 조문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조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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