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이 엊그제 서류조사를 통해, 캠프 캐럴의 의심지역 인근에 화학물질·살충제·제초제 등이 담긴 다량의 드럼통이 매몰됐다고 밝혔다. 그것이 1~2년 뒤 주변 토양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도 전했다. 심각한 오염이 있었음을 시인한 셈이다. 미군의 이런 태도는 지금까지의 일방주의나 비밀주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이어서 일단 반갑다.

그러나 그런 변화를 인정한다 해도, 여전히 께름칙한 심정을 숨길 수 없다. 고엽제 드럼통이 매몰됐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그야말로 간단하다. 시추공을 뚫어보면 알 수 있고, 지하투과 레이저 등 비파괴 검사 기술을 이용해도 미세한 균열까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미군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방대한 양의 서류부터 조사하겠다고 고집하고 있어, 공연한 의구심을 일으킨다.
서류조사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건 아니다. 매몰된 물질의 종류와 양, 반입 및 이동 경로와 시기, 이용과 처리 등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주민의 불안이나 국민의 상처 난 감정을 헤아린다면, 고엽제의 매몰 여부를 확인하는 것만큼 당장 급한 일은 없다. 일의 순서를 잘못 잡아, 불필요한 오해와 의문을 야기할 이유가 없다. 증언자를 회유할 시간을 벌려는 것 아니냐는 억측까지 나오는 게 현실이다. 일의 순서와 함께 조사 방법과 절차 그리고 현장조사를 한국 쪽과 함께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도 억측을 해소하는 데 긴요하다. 기왕에 공동조사를 약속했던 터이니, 결심만 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당장 문서 검증부터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례적으로 신속한 조처와 적극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벌써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의 불공정성이 공론화되는 이유를 숙고해야 한다. 진상규명 후 제도개선 논의가 합리적일 터이지만, 검증 방법 및 절차 그리고 조사 과정이 미군 중심으로 이뤄진다면 결과도 나오기 전에 미선•효순 사태 때와 같은 난기류가 재현될 수도 있다. 이제야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주한미군은 독극물 등을 한국 쪽에 통보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반입해 멋대로 이용하고 처리했다. 그에 대한 성찰과 반성도 이번에 함께 보여줘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도 정당한 요구를 회피해선 안 된다. 미국의 선처만 바라는 태도를 보였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맹성할 쪽은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다.

[칼럼] 돈을 버는 세 가지 방법

● 칼럼 2011. 5. 29. 15:56 Posted by Zig

세상에는 돈을 버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을 해서 버는 거고, 둘째는 남의 것을 훔치는 거고, 셋째는 남이 내 것을 훔쳐가지 못하게 지키는 거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우리 인간들은 이 세 가지 방법 중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을 선택한다. 일을 더 많이 하면 더 많이 벌 수 있다. 그러나 남의 것을 훔쳐서 더 많이 벌 수 있으면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에 남의 것을 훔치려고 한다. 속된 말로 도둑질의 벌이가 괜찮으면 일하는 것보다 도둑질하는 게 낫다는 거다. 그리고 남이 내 것을 자꾸 훔쳐가면 일을 더 하는 것보다 남이 내 것을 훔쳐가지 못하게 지키는 게 더 남는 일이 되고, 그러면 일하는 시간을 줄여 지키는 데 쓴다.
독자분들께는 좀 황당하게 들렸을지 모르지만,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한계생산성 균등의 법칙’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제한된 시간과 에너지를 여러 가지 생산활동에 어떻게 배분하는 게 최선인가를 설명한다.

이 이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인간의 경제적 본성을 잘 설명한다. 현명한 부산저축은행의 대주주와 경영진들은 이 원리를 잘 터득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지만, 이는 비단 여기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며, 특히 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우리 사회에 더욱 심해진 현상이다. 다만, 우리가 이런 일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건 그럴듯한 경제이론을 앞세우고 미사여구로 포장해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뿐이다.
자기가 가져야 할 정당한 몫 이상으로 가져간다면 그건 남의 것을 훔치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가 부담해야 할 정당한 몫을 남에게 떠넘긴다면 그건 남의 것을 훔치는 거와 무엇이 다른가. 열심히 일해도 자식 대학 등록금 만들기 어려운 서민들이 어찌 제 몫을 도둑맞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부자가 더 가져가야 성장이 되고 밑으로 떨어지는 국물도 생긴다는 1970년대 사상으로 중무장한 ‘747정책’ 아래 행해진 부자감세, 친재벌, 4대강 건설과 부동산투기 조장, 서민복지 축소, 대기업의 중소기업 약탈 행위 등을 생각해보라. 재벌이나 부동산 부자들한테는 이렇게 버는 것이 정당하게 일해서 버는 것보다 벌이가 훨씬 더 좋으니 현명하신 그분들께서 정부를 부추겨 그렇게 하신 건 당연하다.

대통령께서 친히 금융감독원까지 방문하셔서 “국민들보다 내가 더 분노한다”고 하시면서 “저축은행 불공정 문제를 엄중히 조사해서 조치하라”고 엄명을 내리셨다고 한다. 필자가 감히 그 말씀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는 없지만, 어째 공허하게만 들린다. 대통령께서 저축은행 사건을 감독비리 문제만으로 보셨다면 아직 문제의 본질을 모르시는 거다. 감독개혁을 해도, 아무리 엄중한 조사와 처벌을 주문해도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그때 뿐이다.
도둑질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둑질의 수익성을 낮추는 거다. 법을 엄정히 집행해서 남의 돈을 훔치기 어렵게 만들고, 잡히면 벌금이나 처벌을 무겁게 해서 도둑질의 대가로 치르는 비용을 높이면 된다.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남의 몫을 탐내지 못하게 하면 된다. 해법은 간단하다.
문제는 이 사회가 도둑질의 수익성을 높였다는 거다. 별을 서너개는 달아야 장관이 되는 정부, 두달 만에 3억5000만원을 받았다는 장관 후보자의 남편, 1년에 수억원을 버는 대통령 주변의 낙하산들, ‘경제를 위해’ 항상 용서받는 재벌 총수들, 남의 몫을 뺏는 데 열심인 재벌과 부자들…. 이렇게 부정과 비리, 편법과 사취가 난무하고 용인되는 사회에서 도둑질의 수익성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이 사회가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법은 오직 하나다. 법치다. 국민의 권리를 짓밟는 삿된 법치 말고 국민의 인권과 복리를 지켜주는 공정하고 진정한 법치 말이다. 그래서 뺏고 뺏기지 않으려고 낭비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아껴 모두 일하는 데 써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잘사는 선진사회가 된다. 대통령께서는 국민들이 대통령보다 ‘더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한다.

<이동걸 - 한림대 재무금융학과 객원교수, 전 한국금융연구원장>

[1500자 칼럼] 그리스도인의 삶

● 칼럼 2011. 5. 29. 15:55 Posted by Zig

어느 주일 설교하면서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며 유명한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오케스트라에 대해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어쩌면 한 번쯤은 칭찬할 만한 그런 때에도 연주에 충실하노라 칭찬과 격려보다 질책을 더했다. 그러니 단원들의 불만이 어떠 했겠는가?
한 번은 베토벤의 9 번 교향곡을 연주했는데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단원들은 이번에는 칭찬을 해주겠지 하며 이번에도 칭찬 안 해주면 그를 지휘대에서 밀어버릴거다 했는데 토스카니니가 일갈했다.
“내가 누군가? 토스카니니가 누군가? 여러분은 누군가?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베토벤 만이 위대하다.”고 했다.

곡을 만든 베토벤이 위대하듯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위대하다고 설교를 했는데 예배 후 친교 시간에 토스카니니의 이야기가 나오자 어떤 분이 그렇게 말했다. “우리 편에서는 베토벤이 위대하지만 베토벤 편에서는 연주자가 위대해야 하지요” 했다.
그렇다. 아무리 좋은 곡을 만들었다 해도 그 곡을 연주하는 자들이 곡을 온전하게 해석하고 나타내지 않으면 무위로 돌아가고 곡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피조물 인생 역시 아름다운 생애를 삶으로 빛과 소금으로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나님이 다시 위대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창조하신 그 의도대로 빛을 나타내고 소금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이 생애의 목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작품을 온전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설교자로 강단에서 외치거나 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남을 향해 자비의 손을 내밀거나 오지에서 일생을 헌신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바로 작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뿐인가? 회개하는 모습으로 강단에서 회초리를 들어 자신의 종아리를 치는 모습도 교훈적일 수 있겠다.

나는 최근 한 성도의 고회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었다. 목회자의 자녀로 자란 그는 당시 목회자의 생활환경이 너무 열악하였기에 이유 없는 반항이란 표현 그대로 그는 반항하고 가출하기도 했다. 그래서 때로는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한 번은 유치장 안에서 창틀에 턱걸이를 하듯 매달려서 밖을 보는데 어린 학생들의 장래를 염려하신 교목께서 경찰서를 방문했다가 돌아가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때 가슴에 울컥 치미는 뭔가 있어 크게 결심하고 담당 형사를 불렀다. 이번에 나가면 나,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그는 그 길로 채석장으로 가서 그의 삶을 바꾸었다고 간증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분에게 감동하면서 아울러 나는 나의 지나가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감동을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말로 행동으로 작품을 이루며 나아가 말은 없으나 모습과 분위기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온전히 나타낼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나 스스로 심각해졌다.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 넣은 대학 강사가 공용물건 손상죄로 유죄판결을 선고받았다. 몇 달 전에는 익명으로 6년간 8억5000만원을 기부한 탤런트 문근영씨에 대해서 “기부천사라는 배우 문근영은 빨치산의 손녀”라는 글을 쓴 보수 논객 지만원씨를 비판하면서 “지만원, 지는 만원이나 냈나”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린 누리꾼에 대한 모욕죄 유죄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표현의 자유가 어떤 지경에 있는지 웅변해주는 판결들이다.
법리적으로만 따진다면 이 사건들을 기소한 검사들이나 유죄를 선고한 판사들을 위해서도 변명을 할 수 있다. 우선 공용물건 손상죄나 모욕죄가 엄연히 형법전에 존재하고, 기존의 판례에 따르면 포스터에 낙서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이름을 소재로 조롱을 하는 것도 범죄로 볼 여지가 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과연 이런 정도의 행동에 형벌로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다른 사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풍자나 조롱에까지 법의 잣대를 들이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1910년 2월7일 영국 해군의 기함인 드레드노트호에 ‘아비시니아’라는 나라의 왕자들이 방문한다는 전신이 도착한다. 외무부 부장관의 서명이 들어간 전신이었다. 해군 장병들은 외국의 왕족들을 정중하게 맞았고 사열을 받았다. 몇몇 장교들은 아비시니아의 명예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왕자들은 “붕가! 붕가!”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전함을 둘러본 뒤 자리를 떴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왕자들’이 가짜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중에는 심지어 여자도 있었다. 젊은 시절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였다. 울프 남매와 네 명의 친구들이 변장을 하고 장난을 친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기함 선상에서 단단히 망신을 당한 대영제국의 해군은 분노했다. 군이 보기에 반전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동기부터 불순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외무부 부장관의 서명을 위조한 것이고 일종의 공무집행 방해다. 공문서 위조나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죄로 기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장난에 불과한 행위를 범죄로 처벌하는 것이 상식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풍류시인 김삿갓은 지방 유지들과 다툰 뒤 그들의 이름을 소재로 조롱하는 시를 썼다. 각각 원씨, 문씨, 서씨, 조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원숭이, 모기, 쥐, 벼룩에 빗대는 내용이었다. “지만원, 지는 만원이나 냈나”라는 글이 모욕죄에 해당한다면 김삿갓의 시도 분명 범죄다. 하지만 조선 왕실은 김삿갓을 처벌하지 않았다. 심한 욕설도 아닌 이 정도의 조롱이 범죄에 해당한다면 서로 놀리면서 장난을 치는 아이들은 매일같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결론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지만원 사건이나 쥐 그림 사건 판결문을 읽어보면 나름대로 유죄판결의 근거를 상세히 적어놓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들이 영국이나, 심지어 조선 사회에서도 처벌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볼 때 과연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지극히 의문이다.
영국 정부가 버지니아 울프를 처벌하지 않았다고 해서 영국의 법질서가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드레드노트호가 독일의 잠수함을 격침시켰을 때 축하 전문의 내용이 “붕가! 붕가!”였다. 장난은 이런 식으로 받아넘겨야 한다.

보도에 따르면 쥐 그림 사건 담당 검사는 이 사건을 “국민들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에 대한 꿈을 강탈한 조직적 범죄행위”로 규정하면서 징역 10월을 구형했다고 한다. 정말 우리 사회가 정부의 홍보 포스터에 풍자적인 그림을 그려 넣었다고 해서 교도소에 10개월을 갇혀 있어야 하는 사회가 된 걸까. 법률가의 한 사람으로서 말할 수 없이 부끄럽다.

<금태섭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