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사태 이후 원자력이라는 괴물 때문에 줄곧 가위눌려 지내고 있는 느낌이다.
핵산업은 한번 중대사고가 발생하면 그동안의 이익 전체를 훨씬 능가하는 손해를 입힐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지구를 거주 불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어놓을 게 분명한 프로젝트이다.
핵산업 추진세력이 이것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은 핵발전의 절대 안전성을 되뇌면서도 진심으로는 그렇게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구 생태계가 파괴되거나 오염되면 자본가나 권력자라 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이 끔찍한 짓을 계속해왔고, 지금도 그만두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이 상황에서 제일 아쉬운 것은 양심적 과학자·전문가들의 사회적 발언이다. 정부나 핵산업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어용학자들의 상투적인 발언이 아니라 독립적 연구자들의 발언이야말로 가장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지금 우리가 원자력에 관련해서 구해볼 수 있는, 그런 발언이나 문헌은 거의 전부가 해외의 연구자나 전문가들에 의한 것이다. 물론 국내의 자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대체로 반핵운동 단체에 속한 시민운동가들, 즉 비전문가에 의한 실무적 문건이다. 따라서 이 문건들도 최종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은 해외의 관련 전문가들이 쓴 자료이다.
물론 외국의 과학자들이라고 해서 발언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오늘날 과학연구라는 것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국가 혹은 자본의 요구와 연계되어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과학자가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원자력 관련 연구는 그것이 국가주의 혹은 군사적 논리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60년 이상 핵산업이 성행해왔는데도 지금 인류사회에는 인공 방사능이 과연 얼마나 어떻게 사람과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정설(定說)이 없다.
이렇게 된 것은, 간단히 말해서, 권력에 의한 정보의 독점과 독립적 목소리에 대한 억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핵산업 추진세력은 끊임없이 방사능 피해의 규모를 축소·은폐하려 하면서, 심지어는 미량의 방사능은 생명체에 유익하다는 주장까지 해왔다. 이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자들은 예외없이 수난을 당하거나 노골적인 박해를 받아왔다.
오늘날 세계보건기구(WHO)조차 방사능 피해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하는 데 심각한 부자유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도 방사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몇몇 양심적인 과학자·전문가들의 의로운 결단 덕분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피해가 10~20년 뒤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방사능의 가공할 피해를 알지 못하고, 또 그동안 행해진 무수한 핵실험, 원자력발전, 열화우라늄폭탄 따위로 세계 전역에 방사능 오염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비단 원자력기술뿐만 아니다. 갈수록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오늘날 독립적인 과학자의 존재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 속의 과학자들은 점점 더 자본과 국가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이 개탄스러운 상황이 극복되지 않는 한, 과학기술은 인간다운 삶의 증진에 기여하기는커녕 삶 자체를 근원적으로 망가뜨리는 악마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악마의 도구가 되기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과학기술의 인간화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는 과학자가 진정한 ‘시민과학자’일 것이다. 그런 시민과학자를 볼 수 없는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이다.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

[한마당] 세상에 무명씨란 없다

● 칼럼 2011. 5. 30. 16:40 Posted by Zig
유명인들의 사진과 맛 소감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간이 맞지 않아 주인에게 말했더니 대답이 가관이다. “그거 현빈도 맛있다고 한 건데….” 그 말을 전하는 주인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짜증이 역력하다. 폭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유명인들의 취향과 내 입맛이 무슨 상관인가.
세상에 이름 없는 사람은 없을 터이니 무명씨는 유명인의 반대말쯤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그 이분법적 인적 구성이 정점에 달한 사회다. 공인이란 개념도 지위에 걸맞은 책임과 권한에 의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유명하냐에 좌우될 정도다.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인 여고생 가수에게 공인의 책임의식을 강요하고 해병대를 자원한 인기 절정의 연예인은 사회지도층 인사로까지 격상된다. 그렇게 따지면 신창원도 공인이고 뽀로로도 사회지도층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유명인과 무명씨의 관계는 병적일 정도로 비대칭적이고 비상식적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편부당한 공생관계 같다. 무명씨들은 닥치고, 찬양하고, 복종하라는 구조다. 투명인간 취급한다.

로마의 귀족들은 노예가 있건 말건 그 앞에서 모든 일을 했다. 심지어 배설이나 섹스까지 거리낌없었다. 노예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짐승이나 투명인간 정도로 취급해서 그렇다.
세계적 핵물리학자가 피교육생 신분으로 앉아 있는 민방위 교육장에서 원전의 경제성과 안전성을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강요하는 강사에게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모든 이들은 무명씨다. 자기보다 생각이 짧고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투명인간에 가깝다. 계몽질과 훈계질의 대상에 불과하다. 유명인으로 대변되는 권력자들은 무명씨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잘 알리기만 하면 흰 꽃도 까망 꽃으로 인식시킬 수 있다고 자신한다. 착각이다.
한 미국 영화에서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민간인 학살까지 서슴지 않는 상원의원은 정의와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진실은 내가 정한다”며 코웃음 친다. 무명씨들을 투명인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발언이다. 공정사회를 ‘공무원이 정하는 사회’로 재규정하는 시중의 우스개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도 그래서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명씨로 취급받을 때 그 모욕감과 낭패감은 제어하기 어렵다. 종내엔 부당하고 억울하다는 느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투명인간이 아닌 한 시인의 절규처럼 ‘가슴이 못질을 알아본 날’들로 살아갈 수는 없다. 부당하고 억울한 감정은 사람을 분노케 하고 무릎 꺾이게 한다.
살아생전 작가들의 스승으로 추앙받던 한 소설가는 ‘이름 없는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따위의 표현을 엄하게 질책했다. 세상에 이름 없는 꽃은 없다는 것이다.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어서 모를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에 이르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무명씨의 개념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는 사회는 절대로 지속되기 어렵다. 유명인 정우성이 땀을 닦은 손수건엔 열광하고 무명인의 피눈물이 묻어 있는 손수건은 거들떠보지 않는 사회에서 제대로 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란 단언컨대, 없다.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불복종>에서 “우리는 시민이기 이전에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시민이라는 역할 이전에 단독자로서 자신의 인간적 품위와 존엄을 지키는 게 더 우선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쌍용자동차 문제와 관련해 만난 몇몇 이들은 유명하지 않지만 내 가슴에 태산처럼 우뚝하다. 저 홀로, 인간의 품위와 존엄의 가치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럴 것이다. 그들을 단지 이름 없는 해고노동자, 가족, 자원봉사자, 치유자의 큰 테두리에서만 보면 절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봐야 안다. 주변의 다정한 이름을 열 명만 되뇌어보시라. 그 이름들이 모이면 결국 그것이 당신의 얼굴이다. 세상엔 단 하나의 무명씨도 존재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소스라치게 깨닫게 될 것이다.

 < 이명수 마인드프리즘 대표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을 남겨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홀연히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생명의 푸름이 가장 빛을 발하는 오월, 그가 없는 빈자리는 더욱 쓸쓸하고 애달프다. 날이 갈수록 나라 형편이 어지러워지고, 그가 꿈꾸었던 ‘사람 사는 세상’이 아득히 멀어지고 있는 현실도 그를 그리는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분노와 허탈함 속에만 마냥 빠져 있을 수는 없다. 아무리 현실의 벽이 단단하고 높아도 고인이 매달았던 깃발을 내릴 수는 없다. 반칙과 특권의 폐지, 국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그를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남겨진 거부할 수 없는 과제다. 현 정권의 실정이 거듭되면서 희망을 말하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한동안 불가능한 것으로만 보였던 진보개혁 세력 집권에 대한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면서 노무현 정신의 계승과 발전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노무현 정신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느끼고 강조하는 대목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흔들리지 않고 나가는 용기가 바로 노무현 정신의 요체가 아닐까 한다. 생전에 ‘바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그의 우직성이야말로 요즘 정치인들이 가장 귀감으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지금 노무현 정신을 말하는 정치인들은 과연 그 정신에 투철한지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보라.

야권의 지난 2년을 되돌아보면 통합보다는 분열, 단결보다는 갈등의 모습이 더 많았다. 특히 친노세력을 표방하는 세력이 뿔뿔이 흩어져 반목하는 모습은 노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많은 유권자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물론 한때 한솥밥을 먹던 정치세력도 세월이 흐르면 분화하는 게 정치 세계의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다. 기계적인 통합과 단결만이 능사도 아니다. 하지만 조그만 차이를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차이점을 강조하는 뺄셈의 정치, 더 큰 공통의 목표를 향해 단결하기보다는 눈앞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속좁음, 입으로는 노무현의 도전정신을 말하면서도 허허벌판 광야가 아니라 문전옥답 기름진 땅에만 매달리는 약삭빠른 태도는 없었는지 겸허히 뒤돌아볼 일이다.  이제 노 전 대통령의 2주기를 맞아 야권은 이런 소아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무현 정신은 특정 정치세력의 전유물이 될 수도 없고 없고 돼서도 안 된다. 그가 남긴 뜻이 진보민주세력 전체의 공통 자산으로 뿌리내리고 자라나도록 힘을 모을 때다.

주한미군이 엊그제 서류조사를 통해, 캠프 캐럴의 의심지역 인근에 화학물질·살충제·제초제 등이 담긴 다량의 드럼통이 매몰됐다고 밝혔다. 그것이 1~2년 뒤 주변 토양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도 전했다. 심각한 오염이 있었음을 시인한 셈이다. 미군의 이런 태도는 지금까지의 일방주의나 비밀주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이어서 일단 반갑다.

그러나 그런 변화를 인정한다 해도, 여전히 께름칙한 심정을 숨길 수 없다. 고엽제 드럼통이 매몰됐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그야말로 간단하다. 시추공을 뚫어보면 알 수 있고, 지하투과 레이저 등 비파괴 검사 기술을 이용해도 미세한 균열까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미군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방대한 양의 서류부터 조사하겠다고 고집하고 있어, 공연한 의구심을 일으킨다.
서류조사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건 아니다. 매몰된 물질의 종류와 양, 반입 및 이동 경로와 시기, 이용과 처리 등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주민의 불안이나 국민의 상처 난 감정을 헤아린다면, 고엽제의 매몰 여부를 확인하는 것만큼 당장 급한 일은 없다. 일의 순서를 잘못 잡아, 불필요한 오해와 의문을 야기할 이유가 없다. 증언자를 회유할 시간을 벌려는 것 아니냐는 억측까지 나오는 게 현실이다. 일의 순서와 함께 조사 방법과 절차 그리고 현장조사를 한국 쪽과 함께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도 억측을 해소하는 데 긴요하다. 기왕에 공동조사를 약속했던 터이니, 결심만 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당장 문서 검증부터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례적으로 신속한 조처와 적극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벌써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의 불공정성이 공론화되는 이유를 숙고해야 한다. 진상규명 후 제도개선 논의가 합리적일 터이지만, 검증 방법 및 절차 그리고 조사 과정이 미군 중심으로 이뤄진다면 결과도 나오기 전에 미선•효순 사태 때와 같은 난기류가 재현될 수도 있다. 이제야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주한미군은 독극물 등을 한국 쪽에 통보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반입해 멋대로 이용하고 처리했다. 그에 대한 성찰과 반성도 이번에 함께 보여줘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도 정당한 요구를 회피해선 안 된다. 미국의 선처만 바라는 태도를 보였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맹성할 쪽은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