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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29 [1500자 칼럼] 그리스도인의 삶
  2. 2011.05.24 [한마당] 버지니아 울프와 쥐 그림
  3. 2011.05.13 [1500자 칼럼] 정오의 램프 1
  4. 2011.05.13 [기고] 사람(人)

[1500자 칼럼] 그리스도인의 삶

● 칼럼 2011. 5. 29. 15:55 Posted by Zig

어느 주일 설교하면서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며 유명한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오케스트라에 대해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어쩌면 한 번쯤은 칭찬할 만한 그런 때에도 연주에 충실하노라 칭찬과 격려보다 질책을 더했다. 그러니 단원들의 불만이 어떠 했겠는가?
한 번은 베토벤의 9 번 교향곡을 연주했는데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단원들은 이번에는 칭찬을 해주겠지 하며 이번에도 칭찬 안 해주면 그를 지휘대에서 밀어버릴거다 했는데 토스카니니가 일갈했다.
“내가 누군가? 토스카니니가 누군가? 여러분은 누군가?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베토벤 만이 위대하다.”고 했다.

곡을 만든 베토벤이 위대하듯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위대하다고 설교를 했는데 예배 후 친교 시간에 토스카니니의 이야기가 나오자 어떤 분이 그렇게 말했다. “우리 편에서는 베토벤이 위대하지만 베토벤 편에서는 연주자가 위대해야 하지요” 했다.
그렇다. 아무리 좋은 곡을 만들었다 해도 그 곡을 연주하는 자들이 곡을 온전하게 해석하고 나타내지 않으면 무위로 돌아가고 곡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피조물 인생 역시 아름다운 생애를 삶으로 빛과 소금으로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나님이 다시 위대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창조하신 그 의도대로 빛을 나타내고 소금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이 생애의 목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작품을 온전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설교자로 강단에서 외치거나 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남을 향해 자비의 손을 내밀거나 오지에서 일생을 헌신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바로 작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뿐인가? 회개하는 모습으로 강단에서 회초리를 들어 자신의 종아리를 치는 모습도 교훈적일 수 있겠다.

나는 최근 한 성도의 고회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었다. 목회자의 자녀로 자란 그는 당시 목회자의 생활환경이 너무 열악하였기에 이유 없는 반항이란 표현 그대로 그는 반항하고 가출하기도 했다. 그래서 때로는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한 번은 유치장 안에서 창틀에 턱걸이를 하듯 매달려서 밖을 보는데 어린 학생들의 장래를 염려하신 교목께서 경찰서를 방문했다가 돌아가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때 가슴에 울컥 치미는 뭔가 있어 크게 결심하고 담당 형사를 불렀다. 이번에 나가면 나,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그는 그 길로 채석장으로 가서 그의 삶을 바꾸었다고 간증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분에게 감동하면서 아울러 나는 나의 지나가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감동을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말로 행동으로 작품을 이루며 나아가 말은 없으나 모습과 분위기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온전히 나타낼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나 스스로 심각해졌다.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 넣은 대학 강사가 공용물건 손상죄로 유죄판결을 선고받았다. 몇 달 전에는 익명으로 6년간 8억5000만원을 기부한 탤런트 문근영씨에 대해서 “기부천사라는 배우 문근영은 빨치산의 손녀”라는 글을 쓴 보수 논객 지만원씨를 비판하면서 “지만원, 지는 만원이나 냈나”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린 누리꾼에 대한 모욕죄 유죄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표현의 자유가 어떤 지경에 있는지 웅변해주는 판결들이다.
법리적으로만 따진다면 이 사건들을 기소한 검사들이나 유죄를 선고한 판사들을 위해서도 변명을 할 수 있다. 우선 공용물건 손상죄나 모욕죄가 엄연히 형법전에 존재하고, 기존의 판례에 따르면 포스터에 낙서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이름을 소재로 조롱을 하는 것도 범죄로 볼 여지가 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과연 이런 정도의 행동에 형벌로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다른 사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풍자나 조롱에까지 법의 잣대를 들이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1910년 2월7일 영국 해군의 기함인 드레드노트호에 ‘아비시니아’라는 나라의 왕자들이 방문한다는 전신이 도착한다. 외무부 부장관의 서명이 들어간 전신이었다. 해군 장병들은 외국의 왕족들을 정중하게 맞았고 사열을 받았다. 몇몇 장교들은 아비시니아의 명예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왕자들은 “붕가! 붕가!”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전함을 둘러본 뒤 자리를 떴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왕자들’이 가짜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중에는 심지어 여자도 있었다. 젊은 시절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였다. 울프 남매와 네 명의 친구들이 변장을 하고 장난을 친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기함 선상에서 단단히 망신을 당한 대영제국의 해군은 분노했다. 군이 보기에 반전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동기부터 불순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외무부 부장관의 서명을 위조한 것이고 일종의 공무집행 방해다. 공문서 위조나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죄로 기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장난에 불과한 행위를 범죄로 처벌하는 것이 상식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풍류시인 김삿갓은 지방 유지들과 다툰 뒤 그들의 이름을 소재로 조롱하는 시를 썼다. 각각 원씨, 문씨, 서씨, 조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원숭이, 모기, 쥐, 벼룩에 빗대는 내용이었다. “지만원, 지는 만원이나 냈나”라는 글이 모욕죄에 해당한다면 김삿갓의 시도 분명 범죄다. 하지만 조선 왕실은 김삿갓을 처벌하지 않았다. 심한 욕설도 아닌 이 정도의 조롱이 범죄에 해당한다면 서로 놀리면서 장난을 치는 아이들은 매일같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결론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지만원 사건이나 쥐 그림 사건 판결문을 읽어보면 나름대로 유죄판결의 근거를 상세히 적어놓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들이 영국이나, 심지어 조선 사회에서도 처벌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볼 때 과연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지극히 의문이다.
영국 정부가 버지니아 울프를 처벌하지 않았다고 해서 영국의 법질서가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드레드노트호가 독일의 잠수함을 격침시켰을 때 축하 전문의 내용이 “붕가! 붕가!”였다. 장난은 이런 식으로 받아넘겨야 한다.

보도에 따르면 쥐 그림 사건 담당 검사는 이 사건을 “국민들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에 대한 꿈을 강탈한 조직적 범죄행위”로 규정하면서 징역 10월을 구형했다고 한다. 정말 우리 사회가 정부의 홍보 포스터에 풍자적인 그림을 그려 넣었다고 해서 교도소에 10개월을 갇혀 있어야 하는 사회가 된 걸까. 법률가의 한 사람으로서 말할 수 없이 부끄럽다.

<금태섭 변호사>

[1500자 칼럼] 정오의 램프

● 칼럼 2011. 5. 13. 16:45 Posted by Zig
- The Lamp at Noon -

이 작품은 캐나다 소설(영어)사에서 초기의 작가인 Sinclair Ross가 쓴 단편소설이다. 그의 대표작인 ‘As For Me and My House’는 캐나다문학사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을 거론하는 이유는 캐나다의 이민초기, 서부 지방을 개척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불모의 땅을 어떻게 경작할 수 있는 땅으로 만드는지가 관심사였다. 이 소설의 지리적 배경인 사스카처완은 지금은 프레리 지방이라 불리는 세계 곡창지대이다. 개척의 역사는 한 마디로 인간의 의지와 자연과의 싸움이었다. 이 작품에서는 극심한 가뭄과 바람이 자연을 대표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안정이 된 온타리오 주에서 새로운 도전을 위해 사스카처완으로 이주해 온다. 이 소설을 읽으며 시간과 장소의 차이는 있지만 이민자인 내 자신을 돌아봤다. 어차피 새 땅에 뿌리를 내리며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는 점에 있어 한가지니까.

두 젊은 부부인 폴(Paul)과 엘린(Ellen)에겐 요람에 누운 어린 아기가 있다. 소설은 엘린이 정오 조금 전에 램프의 불을 켜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그녀의 집안은 어둡고 먼지로 가득 차 있다. 창문에 매달려 밖을 보아도 짙은 안개가 낀 양 먼지에 가려 밖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오랜 가뭄 속에 3일째 쉬지 않고 바람이 불고,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그녀가 남편을 위해 준비한 식사에도 어느 덧 먼지가 잔뜩 쌓여있다. 이 장면은 무엇보다 그들의 어려운 현재와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미래라고 할 아기마저 먼지로 가득 찬 공기 때문에 폐렴에 걸릴까 걱정한다.  “There’s dust in everything.”
몇 해 째 가뭄이 계속되고, 심은 밀들은 마른 지푸라기가 되어 날아간다. 새 땅에 심은 꿈도 날아가고 앞에는 먼지만 남은 셈이었다. 늘어나는 것은 빚뿐이었고 점점 가난의 수렁 속에 빠져 들어갔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그들의 싸움은 상대방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에린은 그녀의 친정이 있는 온타리오 주로 돌아가길 원한다. 폴은 결코 자신의 꿈이 남아있는 땅을 버리고 돌아갈 수 없는 농부였다.

“This is where I belong,” 그는 언젠가 비가 내리고 좋은 시절이 오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에린은 말한다.”어디 간들 이보다 못한 곳이 있겠어요?” 결국 그녀는 어린 아이를 껴안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가, 모래바람 속에 파묻히고 만다. 폴이 발견했을 때, 에린은 흙바람 속에 아이를 보호하려고 아이를 껴안고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몸은 벌서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녀가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손질하려고 폴이 아이를 안고 있는데 아이가 앞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걸 보고 에린은 말한다.”당신은“여태 아기를 안을 줄도 몰라요?“ 집으로 돌아가며 그녀는 남편에게 말한다.”당신 말이 맞아요. 오늘 밤부터 바람이 잦아 들 거라고 했죠? 지금 너무 평온하고 하늘이 빨갛군요. 이건 내일부터 괜찮을 거라는 예기에요.”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말하고 있다. 아이까지 잃어버린 줄 모르고, 내일을 말한다는 이유로 그들은 결코 패배자가 아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그들은 결코 쓰러지지 않고 일어나 앞으로 나가리라. 지금 이 땅에서 쓰러지는 많은 이민자들에게, 다시 일어서 걸어야 하는 이민자들에게 소설은 좋은 교훈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민자는 결국 내일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다. 소설의 마지막 줄을 다시 음미해본다.
 “-tomorrow will be fine.”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기고] 사람(人)

● 칼럼 2011. 5. 13. 16:42 Posted by Zig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하여 사람인(人)자는 둘이 서로 기대어 버티고 선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한다. 글자의 뜻과 같이 우리는 가족을 포함하여 너무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지만 외로워 견디기 힘들 때도 있고, 근심과 절망에 쓰러질 때도 있다. 서로 의지하여야 하는 사람들이 절망을 안고 쓰러지고, 자기 혼자만의 성을 쌓고 외로워하는 것은 슬픈 이야기다.
그래서 ‘사람’ 이라는 제목을 써놓고 보니, 이거 잘못 들어갔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을 주제로 글을 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일이 아닐까 해서다. 인간이 창조되고 부터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다루었고, 그 답은 저마다 모두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글을 쓰기 시작하였으니 나름대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우리들은 사람을 인간(人間)이라 하며 잘못된 사람을 향하여 “먼저 인간이 되라”고 훈계를 한다. 아직도 우리의 글에는 한자(漢字)가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많이 있다. 사람을 인간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한자가 주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이미 사람’人’자가 사람임을 표시하는데도 사이’間’ 자를 붙여서 그 뜻을 완성하였다.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가 형성될 때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 ‘인간’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사람다운 사람을 인간이라 칭해야 되는데, 가끔 사람답지 못한 사람을 칭할 때 “아이구! 이 인간아!”라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 정말 인간이란 사람과의 관계형성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슬픔, 기쁨, 행복, 빈부, 화, 인내, 평화, 사랑, 이 모든 것이 관계가 없다면 무의미 해진다. 어떤 이는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 간섭하지 말라, 주는 것도 싫고 받는 것도 싫다.” 하면서 극히 자신을 공평한 사람으로 인식하시는 분도 계신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부모와 친척, 친구, 선생님, 책을 쓴 저자, 각종 생활용품을 만드신 분들, 정치가에 이르기 까지 나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지금도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스스로 만들어 진 것이 하나도 없다. 가끔 서로의 신뢰가 깨어지는 아픔이 있다. 쌍방 모두의 손실이며 쌍방 모두의 오해와 관용의 부족으로 신뢰는 깨어진다. 이럴 때도 지혜가 필요하다.
모든 이들이 실리를 추구하거나 자신이 도움을 받았던 것을 잊음으로 인하여 오해가 생긴다.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 조금 손해를 보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고려 말 충신 목은 이색은 “사람이 가진 것이,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없는데 자기 손에 들어오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라고 하였다. 사람의 욕심에 대하여 일침을 하신 말씀이다. 심지어 부부간에도 매일을 서로가 힘들어 하며 사는 경우가 있다. 반면에 서로가 너무나 소중한 사람으로 알고 서로를 아끼며 사랑으로 사는 부부도 있다.
예수님의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명쾌한 해답을 얻게 하신다. 모두를 사랑하셨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삶 이다.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음이라고 하셨다. 믿음은 약속이며, 약속은 서로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이웃과의 믿음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하여준 모든 것을 생각해 본다. 내가 남에게 기대어 서는 사람 인(人)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어보자. 특별히 가정의 행복은 이웃을 행복하게 만들고 사회를 행복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하여도 천국을 만들 수 있음을 믿고 나아가자.

<정훈태 장로 - 목민장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