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원숙한 삶의 길을 향하여

● 칼럼 2011. 5. 5. 14:36 Posted by Zig

인생이 그래도 무엇인가 알만하려면 적어도 50은 넘어야 한다는 말을 숫하게 들어왔다.
그러나 이 말에 동의하기까지 이순을 넘어서야 겨우 할 수 있었으니 철이 조금은 난 건지 모르겠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물의 이치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면서 다듬을 것은 더 다듬고 포기 할 것은 포기하며 한 우물이나마 정성스럽게 파서 맑은 물 나올 때 까지 인내해보자는 마음이 생긴다. 남의 실수를 관용으로 받아줌은 실수 많았던 지난날의 부끄럼 때문이오, 비판의 눈이 이해하려는 눈보다 날카로웠을 때는 남에게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이 진리가 내 것이 안 되었기 때문이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보고 질타했던 것을 뼈아프게 후회한 것은 내가 그 꼴을 당하고 난 후 몸살을 겪고 난 경험 때문이었다. 과거의 노예가 된 사람은 불행을 만들고 현재에 만족한 사람은 어리석게 살지만 먼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은 지혜와 행복을 얻는다는 어느 분의 말이 살면서 조금씩 알겠더라.
때가 되어야만 이해되고 현실감이 생기는 일이 있다.

나이테가 바로 그것이다. 나이테가 굵어질수록 관념적으로만 이해되었던 것이 구체적인 사실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비로소 어른들이 일러주고 말해주었던 당신들의 경험 이야기가 피부로 전달되면서 아 ! 그래서 그런 말씀들을 어른들이 들려주었구나. 내가 어른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품위와 맵시를 잃지 않고 쓸모있는 사람으로 늙어갈 수 있는 길을 걷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의 소원이 아닌가.
멋있게 창의적으로 완숙의 미를 최대한으로 발휘하며 연륜의 테를 쌓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국이 낳은 노인학의 선구자이며 의사요 병리학자요 문필가인 알렉스 콤퍼트 박사는 그의 저서 「A Good Age」란 책에 수북이 실어 놓았다.
20세기의 거장으로 영향력있는 사상가요, 철인인 버드란트 럿셀이 핵무기 반대 캠페인에 앞장서서 일하다 사임한 것이 그가 88세였던 1962년이었고 그의 자서전이 출판된 것은 1969년 그의 나이 95세 세상 떠나기 1년 전이었다. Cecil B. Demille은 헐리우드 창설자로 영화 감독이며 동시에 연출가이기도 했다. 그가 ‘The Greatest Show on Earth’란 영화를 감독하여 아카데미 수상을 받은 것이 71세였던 1952년이었고 4년 후엔 그의 70번째 영화가 된 그 유명한 ‘십계명’을 만들어 냈다. 위대한 현대 미술의 거장 피카소는 91세로 그가 운명 할 때까지 젊은이들이 따를 수 없는 힘찬 정력으로 16세 첫 번 전시회를 가졌을 때부터 75년 동안 그림과 조각 드로잉 등 불멸의 작품을 창작해 냈다.

역사적인 인물에서만 찾아 볼 필요도 없다. 오늘 날 우리와 함께 같은 하늘 아래서 숨 쉬고 있는 우리들의 어른들이 계시다. 9순에 접어드신 종교음악. 동요작곡가의 거장 박재훈 박사는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공연을 목표로 오페라 ‘순교자 손양원 목사’작곡에 노혼을 불태우고 계시다. 그분에 의하여 한국의 성자로 불리우는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가 오페라로 재생되고 있다. 나의 청년시절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아들로 받아드린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 ‘사랑의 원자탄’을 무척이나 감명깊게 읽었던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또한 우리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신 87세 되신 이상철 목사님이 계시다. 2011년 1월 그분의 자서전 출판 기념회장에서 보여주신 그분의 삶의 일대기는 현재 이민을 살고 있는 동포사회에서나 캐나다 교계의 지도자로 우뚝 서 계심을 극명하게 들어 올려놓는데 손색이 없었다. 문필가로서의 예지로 가득한 글은 후학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주시기도 한다. 지금도 당신이 필요하다면 달려가시는 홍안(紅顔)의 백발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노욕(老慾)은 추하다. 그러나 원숙한 삶의 모습은 향기를 발산한다.

<민혜기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북한이탈주민을 다룬 <무산일기>가 부산영화제를 시작으로 트라이베카영화제에 이르기까지 유수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 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배고픔에 지쳐 강냉이 한 자루를 사이에 두고 친구와 싸우다 친구를 죽이고 남한으로 넘어온 젊은이의 남한 내 생존 기록을 극도의 절제된 화면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는 과연 그 국제적 찬사에 값할 만했습니다. 특히 분신처럼 아끼던 강아지의 죽음을 주인공이 오랫동안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주인공 전승철은 125로 시작되는 탈북자 주민번호를 가진 까닭에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합니다. 벽보 붙이기나 노래방 아르바이트로 입에 풀칠을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관할구역을 침범했다고 주먹질을 당하고, 노래방에선 오해를 받고 쫓겨납니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는 다른 탈북민들에게 사기나 치고. 그러다 보니 거리에서 주워 온 백구가 그의 유일한 마음붙이였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친구가 빼돌린 돈을 대신 차지하고 새 삶을 시작한 순간, 그 백구가 차에 치여 숨지고 맙니다. 주인공이 죽은 백구를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보았던 것은 그 속에서 폭력적 자본주의 사회의 희생물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영화는 남과 북의 위정자들과 우리 사회가 북한 동포들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전승철은 강냉이 한 자루를 차지하기 위해 친구와 죽도록 싸울 수밖에 없었는데도 북한 정권은 체제 수호를 위한 핵개발에 매달리며 나 몰라라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넘어온 남한 사회도 그를 품어주지 않는 것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승철뿐이 아닙니다.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선 어김없이 남한 사회에서 배제당하고 차별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 배제와 차별의 결과 그들은 스스로를 2류 시민으로 인식하게 됐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해 왔습니다. 북한 인권 전문가를 국가인권위원에 임명하고, 민간단체에서 북한 주민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킨다며 대북 전단을 뿌리는 것도 방치합니다. 그런데 유독 인권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인권인 북한 주민의 생존권에 대해선 눈을 감습니다.

물론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말처럼 북한에 대한 인도적인 식량지원이 사실상 북한 정권에 대한 지원이 된다는 현실적 딜레마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북한은 과거와는 달리 식량 배분에 대한 모니터링을 허용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현실적 딜레마를 내세워 동포들이 굶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다면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북한을 방문했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군사적 문제와 연관시켜 대북 식량지원을 회피하는 것을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비판했습니다.
북한이탈주민을 받아들여 2류 국민으로 만드는 것 역시 그들은 물론 우리 사회에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사회적 배제와 차별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는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이나 프랑스의 이민자 폭동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소망스러운 것은 북한 정권이 북한 동포들의 생존을 감당하게 만드는 일일 겁니다. 그러려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뤄져야 합니다. 우선 인도적 식량지원으로 당장의 식량위기를 넘길 수 있게 해주는 한편 체제에 대한 위협을 줄여줌으로써 가용자원을 체제 유지가 아닌 주민생활 개선에 투입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남북대화와 6자회담의 재개가 긴요한 까닭입니다.
올해 들어 북한은 다양한 경로로 대화 복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카터를 통해서도 조건 없는 남북대화를 제기했습니다. 정부는 대화를 위한 대화는 안 된다며 북한의 진정성을 요구하고 있지만,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만나야 합니다. 북한 동포의 인권을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지금이야말로 남북한 주민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기존의 대북정책을 전면 전환할 때입니다.

<권태선 - 한겨레신문 편집인>

미군에 사살당한 오사마 빈라덴이 황급히 수장당한 아라비아해는 세계 제일의 지정학적 요충지이다. 빈라덴의 수장은 이 아라비아해의 파고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
실마리는 미국이 그의 죽음을 계기로 아프가니스탄 전쟁, 더 넓게는 아프간-파키스탄 전쟁, 즉 아프팍 전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느냐에 있다. 이는 지난 10년 넘게 전세계에 자상을 낸 테러와의 전쟁의 출구도 된다.

아프간 전쟁은 빈라덴과 알카에다 소탕을 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소탕이 10년 이상을 끌면서 아프팍은 ‘이슬람 성전지’로 바뀌었다.
애초부터 아프간은 이슬람 전사들인 무자헤딘과 이슬람 무장주의의 메카였다. 1970년대 말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맞서, 이슬람 세계의 피끓는 전사들이 모여들어 소련을 패퇴시켰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중앙정보국이 파키스탄 정보당국을 통해 양성한 전사들이 탈레반이다. 또 아프간에서 싸웠던 무자헤딘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이슬람 무장조직의 근간이 됐다.
알카에다 소탕을 위해 아프간에 들어온 미국은 자신들이 키운 탈레반과 무자헤딘에 발목이 잡혀, 소련이 빠진 수렁에 빠져 있다.

그 수렁의 깊이는 얕을지 몰라도, 넓이는 더 크다. 파키스탄까지 수렁이 됐기 때문이다. 아프간전의 여파는 파키스탄 탈레반을 탄생시켰고, 아프간과 접경한 북서변경주의 연방부족자치지역인 와지리스탄 등은 파키스탄군도 진주하지 못하는 사실상 독립국가가 됐다. 미군이 이 지역을 무인기로만 타격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잘 말해준다. 2009년 봄 파키스탄 탈레반은 연방부족자치지역에서 벗어나 수도 이슬라마바드 북쪽으로 100㎞ 떨어진 도시 부네르까지 함락하며 ‘파키스탄 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다른 이슬람국가와 차원이 다르다. 인구는 1억6000만명으로 인도네시아에 이어 이슬람권의 두번째이고, 백만 대군과 핵무기까지 보유했다. 무엇보다도 파키스탄의 지정학적 위상이다. 걸프지역으로 들어가는 아라비아해에 접했다. 서쪽으로는 이란, 북쪽으로는 아프간과 옛소련의 중앙아시아 지역과 이웃하고 있다. 이제 하나로 묶인 아프팍이 이슬람주의 지대가 되면, 서방으로서는 아라비아해 접근이 위협받는다. 특히 새로운 석유지대인 중앙아시아 접근이 봉쇄된다.

미국은 빈라덴을 잡으려다 아프팍이 이슬람주의 지대가 되는 위기에 봉착했다. 이제 미국은 빈라덴의 죽음으로 아프팍 전쟁에서 탈출할 명분을 잡았다. 이미 탈레반과의 평화협상은 공공연히 거론된 상황이다.
빈라덴의 죽음을 발표한 오바마의 기자회견에 앞서 한 미국 관리는 “알카에다가 없다면 우리는 탈레반과 타협할 수 있다. 탈레반은 여러 제3세계 내전의 단지 한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오는 7월로 예정된 아프간 주둔 10만 미군 병력의 철수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미국이 탈레반과의 평화협상에 적극 나서서 아프팍 정세가 안정된다면, 빈라덴의 죽음은 평화로 가는 길이 될 거다. 테러의 공포를 일상화한 고통스런 ‘9.11 시대’를 종료할 출구가 될 거다.

미국은 과연 그 길을 걸을 의지와 역량이 있을까? 알 수 없다. 미국은 파키스탄 군부와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에 건성으로 참가했다며 그들을 믿지 못한다.
나치 점령 프랑스에서 저항운동을 한 클로드 모르강은 저항운동가들의 희생과 결단을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이란 책에 담았다.
아프팍 전쟁을 종료하지 못하고, 9.11 시대의 출구를 못 찾으면, 아라비아해는 ‘꽃도 코란도 없는’ 빈라덴의 거대한 해릉이 될 것이다. 아마 이슬람 전사들이 그 무덤에 꽃과 코란의 성구를 뿌리며, 아라비아해의 파고는 더 높아질 것이다.

<한겨레 국제부 정의길 선임기자 >

[1500자 칼럼] 노남석의 생활칼럼

● 칼럼 2011. 4. 26. 15:31 Posted by Zig
우유와 달걀

많은 사람들은 제가 음식먹는 모습을 보면서 “야~ 참 복스럽게 먹는다~!” 라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어릴 때 나이드신 분들은 “밥을 복스럽게 먹어서 복받겠다!” 하셨습니다. 저의 형수님은 제가 ‘쩝쩝’소리를 내지 않고 밥을 먹는다고 “삼촌은 정말 신사네!” 하면서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무슨 음식이나 맛있게 먹어서 음식을 해주는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신이나서 음식을 해주었고 그러다 보니 음식솜씨가 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그런데 저의 아들들은 저의 밥먹는 모습을 보면서 질색(?)을 하는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제가 가끔 찬밥을 우유에다 말아서 김치하고 먹는 것입니다. 그게 아이들에게는 못 마땅한 것 같았습니다. 오만상을 찌프리곤 했습니다. “아빠~, 제발 밥을 우유에다 말지 말아요!” “왜~ 어때서~” “그게 뭐예요?” “야~ 너희들은 Cereal을 우유에다 타서 먹지?” “……” “난 밥을 우유에다 말아서 먹는데 다를게 뭐냐?” “Oh~ boy~!” “그리고 아빠는 너희들 처럼 우유를 꿀꺽꿀꺽 마시면 금방 설사를 해~” “……” “그래서 이렇게 밥을 말아서 꼭꼭 씹어 먹으면 침이 잘 섞여서 설사를 안한다구~!” “에~이구~~!” “좀 이상해 보여도 이해를 해줘!” “그럼 아빠 혼자서 있을 때만 하세요” “알았어~”

제가 어릴 때는 우유가 아주 귀했습니다. 저는 우유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6.25 동란 후에는 분유를 학교에서 도시락통에다 배급을 주었습니다. 배가 고픈 아이들은 손으로 분유를 움켜쥐고 입에 털어 넣으면 입주위는 온통 분유로 범벅이 되었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변소(요즘엔 변소라고 하면 질색을 한다던데 그때는 분명히 변소였다)에 드나들기 바빴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분유를 밥 위에다 찌는 것이었습니다. 밥솥에서 쪄낸 분유를 과자처럼 깨물어 먹었습니다. 우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습니다! 없어서 못 먹던 우유가 살이 찐다! Cholesterol이 많다! 하면서, 그 좋은 Milk fat을 몽땅 제거한 Skim milk를 저희도 마시고 있으니… 또 어떤 사람들은 피부에 좋다고 우유를 목욕통 속에 퍼붓고 목욕을 한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두번째는 아내가 방금한 따끈따끈한 밥을 접시에 퍼주면, 저는 냉장고에 가서 날달걀을 한개 꺼내오곤 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얼굴부터 찡그렸습니다. “아빠~ 또~?” “미안! 이 달걀에는 아빠의 어릴 때 추억이 담겨있으니까 너희들이 이해해라!” 접시에 담긴 밥을 약간 옆으로 밀어내고 가운데 공간을 만든 다음에 달걀을 깨서 넣습니다. 소금을 뿌리고, 옆에 밀어 놓았던 따끈따끈한 밥을 달걀 위에 덮고 정성스럽게 비빕니다. 그리고 나서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저의 생각은 어느듯 50년 전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아이들이 불평을 해도 이해를 바랄 뿐 밥을 달걀에 비벼 먹는 습관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먹는 게 귀했던 시절에 달걀을 지져서 도시락 반찬으로 싸오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저의 도시락 반찬은 항상 국물이 줄줄흐르는 김치였으니까요! 후에 누군가의 기발한 Idea에 의해서 구제품으로 나온 병에 든 음식(지금 생각해 보니 Baby food였던 것 같다)을 먹고 난 후에 병에다가 김치를 싸가지고 다녔습니다. 간혹 버스에서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의 가방을 무릎에다 받아주었는데, 그 때 잘못하면 김치 국물이 여학생의 치마에 흐르는 경우도 발생하곤 했었습니다. 너도 나도 모두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오가는 인정은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달걀은 일년 중 생일 때나 아니면 죽도록 아플 때 한개 얻어 먹으면 다행이었습니다. 어쩌다가 달걀이 한개 생기면 동생들과 함께 밥을 모두 커다란 냄비에 넣고, 그 귀중한 달걀을 깨서 넣고 비비고 또 비벼서 노란 색갈이 골고루 섞인 다음에 누가 더 많이 먹을세라, 한 숟갈씩 차례로 돌아가면서 퍼먹었습니다. 밥알에 노란 색갈만 묻어 있으면 천하일미였습니다!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 동생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어머니는 따끈따끈한 달걀을 한개 제 손에 쥐어주시고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게 무슨 대단한 영양식이라고… 그러나 제 손에 쥐어주신 따뜻한 달걀은 음식이 아닌 보약(?)이었습니다! 아니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자식들은 모두 똑같았을텐데, 입시준비를 하는 저에게만 달걀을 주셔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우유에 밥을 말아먹고, 따끈따끈한 밥에 달걀을 비벼서 먹을 때, 저는 추억을 먹는 것입니다.
“좋은 세상에 사는 이 녀석들아~! 너희들이 애비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느냐?”

<수필가 - 어진이의 이민수기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