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둘이냐 하나냐

● 칼럼 2012. 11. 3. 18:14 Posted by SisaHan
너도밤나무는 동해 울릉도의 나무다. 나도밤나무는 본토 바닷가의 나무다. 둘 다 참나무 권속이다. 
그간 서너 차례 대선 야권의 두 진영에 대한 단일화가 촉구되었다. 단일화가 안 되면 촛불집회라도 열어서 그것이 되게 하련다는 절박한 발언도 나왔다. 
나 또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싶었으나 대선정국의 단련 기간을 좀더 지켜보는 쪽이었다. 이제 내 입이 열려 뒷북소리를 낸다. 
지금 새 세기의 입문 10년을 넘겼다. 이것은 세계사 내재로서의 한국사가 새로운 성찰이 담긴 실천사로 나서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이제는 용왕제를 지낸 배가 난바다에 뜬 시간이다. 서론이 아닌 본론의 시대이다. 
이번 대선은 이러한 시대의식의 사유를 구현하는 정치축제이다. 여기에 이제까지의 정치행태에 대한 질적 전환을 전국민적 염원으로 삼는 이유가 있다. 그 어느 시기보다 국민적 또는 시민적 열망이라는 정치 자발성도 놀라운 노릇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표면의 역동성이 무색하게 절망으로 만연됐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현실의 길과 역사의 길이 합치되기를 바라는 합의 지향이 거기에서 뭉쳐진 것이다. 
특히 단일화의 명제 앞에 선 두 진영은 직업정치력보다 시민정치력을 자신의 품성 환경으로 삼고 있다는 공통성이 있다. 요컨대 둘은 대동소이하다. 어쩌면 이 사실은 하나는 청춘의 편이고 하나는 추억을 토대로 삼고 있는 자기조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의 본연성이 결코 인종의 차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 다 기존 정치의 현장에서 닳아버린 전술주의가 아닌 역사 신인으로서의 정치지성이 풍부하다는 강점이 있다. 
우리에게 지겨운 정치욕망의 갈등과 그 답보로는 장차 도래하는 한국사의 운명에 필수적인 창조행위를 발휘할 수 없다. 나는 두 진영의 경박하지 않은 깊은 사려와 고민을 이해한다. 그들의 신중하고 겸허한 닮은꼴의 선택은 이른바 세습주의나 출세주의와는 또 다른 명분에 있다. 
이러한 상대성은 하나가 살면 하나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죽으면 둘 다 죽는다는 그 상생의 가치 앞에서 하나가 죽어 하나가 사는 것이 아닌 둘이 살아나는 방식을 꿈꾸는 그 공존정치를 만들어내게 할 것이다. 
두 진영은 정치적 시간의 협약도 있을 것이다. 그 공간의 공동체도 가능할 것이다. 둘이 사는 방식은 곧 둘이 함께 사는 방식이다. 그것은 연합 또는 복합이나 정치로서의 전기와 후기라는 접속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현명한 관념론인지 모른다. 관념은 현실을 설정하는 힘이다. 
가능한바, 둘의 단일화는 현대 한국 정치사의 최고 형태를 과시하는 명예미학이 될 것이다. 정치가 온갖 음모와 술책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유례가 없는 신기원으로서의 정치윤리를 온 세상에 고양할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문화이겠는가.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자 한다. 두 진영과 맞서고 있는 한 세력은 현 정부의 의지와 장기간 쌓아온 보수의 막강한 환경역학이 총동원되고 있는 상태이다. 여기에다 맞서고 있는 두 진영의 단일화를 야합이라고 탓하며 자신은 앞장서서 특정 지역의 기반을 흡수하는 정당 통합을 처리했다. 바로 이런 한 세력에게도 고언한다. 어떤 비판이나 부정에도 불구하고 대선 구도의 현실은 여야의 실력으로 대결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바에야 한 세력이 상대방 두 진영의 분열을 조장해 그 이익을 챙기려는 내심보다 두 세력 단일화 이후의 양자대결에서 정당하게 이기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런 대선의 당위 앞에서 야권 단일화가 가지는 창조의 정치를 합작해내는 위대성을 기대한다.
 

< 고 은 -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