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친구에게서 가끔 연락이 온다. 잘 키운 두 자녀 결혼을 앞두고 일어나는 일들도 큰 화제거리의 하나이다. 이제는 적령기가 훌쩍 넘은 딸이 사람을 만나 서둘러 결혼을 한다고 하고, 또 연달아 아들까지 사귀어 오던 아가씨와 결혼식을 추진 중인데, 친구 부부에게는 둘 다 자신의 아이들의 배우자로 적당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 된다고 했다. 부부는 아이들의 마음을 돌려보려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하고, 타일러 보기도 했지만 두 아이 모두 설득할 수 없을 것 같다며 크게 염려한다. 긴 통화 끝에 친구가 덧붙이는 말은 “아이들은 본인들의 의사대로 결혼을 할 것 같은데,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해서 어떻게 맘에 썩 내키지 않는 예비 사위와 며느리를 대하여야 할 지 모르겠다” 였다.
전화를 끊고 계속 친구의 마음을 되뇌이며, 사람의 만남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 수시로 우리 마음으로 스며드는 불확신과 두려움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맺는 인연들을 돌이켜 보면, 미리 준비하고 상대방을 선택하는 일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알지 못하는 미래를 두려워하고 상대방과의 관계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너무 베풀면 공정한 관계가 성립하지 않을 것 같고, 간혹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도 한다.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조차도 얼만큼의 보호와 사랑의 표현이 아이를 강건히 자라게 할 것인지 전전긍긍한다. 마음으로부터 솟는 자연스런 감정의 표현보다는, 정해진 법도에 따라 행동하기도 하고, 견제하고 또 조심스레 마음을 열어 보이며 관계를 성립해 간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이런 우리의 모습은 직장의 동료는 물론, 친구, 배우자 하물며 부모 자식 간에도 이어지는 인간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렇게 밀고 당기던 인연도 그것이 끝나는 순간이 오면 여태까지의 염려와 주저함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었는지 사무치게 느끼게 된다, 아버지께서 오랜 세월 치매로 고생을 하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력만 잃으시는 게 아니라 성품도 달라지셔서 갈수록 옛 아버지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남에게 의존하며 순간순간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결국 그렇게 의지하시던 어머니가 옆에 계시는데도, 불안하게 아내를 찾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그만 세상을 떠나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하지만 긴 투병 생활 끝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순간 모든 것이 절벽 밑으로 떨어져 일말의 가능성도 남아있지 않다는 절망감이 들었다. 그것은 아버지 삶이 이어지는 가능성이 아니라, 내가 그 분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막막함이었다. 그 때까지 아버지가 무엇을 얼마만큼 기억하실 수 있는가 왜 그리 걱정을 했는가 싶었다.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였는지 생각 못했다는 후회였다.
이제는 성인이 된 아이들, 옆에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조카들, 먼저 보낸 친구들, 모든 헤어짐 후에는 아쉬움이 더 크다. 그나마 작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들과 만들어낸 반짝이는 따뜻한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삶 속에 거듭되는 확신없는 시작과, 후회스런 끝 마침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생각해 본다. 이제 삶의 연륜이 깊어, 우리가 맺어가는 긴 여로의 끝을 가늠하면서, 살아가는 순간들에 필요한 용기와 지혜를 얻을 때도 되었다. 끝을 보면서 시작을 준비해 보는 연역적인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된다.
며칠 후 다시 친구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로 ‘어차피 이제는 한 식구가 될 사람들이니, 어른이 두 팔 벌려 보듬어 주어야겠지’ 라고 말한다. 경험도 없고, 만족스럽지 못한 발 걸음을 내 딛으며, 그 여정의 끝을 이해하는 현명한 친구의 마음 다짐이 보인다.
< 김인숙 - ‘에세이 21’로 등단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심코 가톨릭교육청 언어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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