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흐릿한 청산의 후유증

● 칼럼 2013. 5. 24. 19:22 Posted by SisaHan
특별난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상품광고는 반복이 큰 힘을 발휘한다.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다가도 반복해서 자꾸 보고 들으면 관심이 쏠려 기억하게 되고, 괜찮은 제품인가보다, 그만한 함량이 있으니 저렇게 선전하겠지, 하는 끌림과 믿음이 생겨나 슬슬 지갑을 여는 것이다. 그러니 반복 선전은 광고심리학에 있어서 기본이다.
사람의 판단력에는 이성 보다 감성이 늘 앞서게 마련이어서 어떤 판단대상이 반복 주입될 때는 옳고 그르냐, 좋으냐 나쁘냐를 이성적으로 따져보기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런가보다’ 하는 무의식적 신뢰가 생기고, 더 나아가면 잠재적 신념으로 자리를 잡기까지 한다.
 
지난주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전후해 “5.18은 북괴군 600명이 침투해 벌인 폭동이었다더라” 는 등 북한 사주에 의한 반란이라는 식의 그럴 듯한 주장을 조선·동아 계열의 종편에서 잇달아 방송해 파문이 일었다. 아무리 영향력 미미한 종편이라지만 방송에서 버젓이 그런 주장을 떠들어 대는데, 더구나 북한군 출신이라는 탈북자가 나와서 큰소리치는 것을 시청하고 있노라면, 별 생각없는 범부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다” “맞아 그럴거야”라는 반신반의가 번질 수밖에 없다. 살벌했던 5공 군사정권 때 ‘북의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고 떠드는 선전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고, 당시의 주역들이 여전히 위세를 부리는 모습도 한 몫 거든다. 지금도 다수 보수권세가들이 ‘민주항쟁’으로 기꺼이 존숭(尊崇)하기를 망설이는 현실이니, “맞는 말일거야”라는 수긍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정부기관이 나서서 5.18 기념식장에선 무슨 노래를 부르지마라, 주먹을 흔들며 부르면 안된다는 억지를 부려 반쪽행사로 만든 꼴불견도, 반신반의에서 확신까지를 독버섯처럼 번져나가게 만든 반복선전의 악행을 거들었다. 이 곳 토론토에서도 어느 분의 지적처럼 항쟁의 뜻을 기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는 커녕 골프대회를 열어 즐길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오죽했으면 ‘원조 반공극우’라고들 하는 조선일보 출신의 조모 씨도 나서서 “말도 안되는 허구”라고 반박했을까. 당시 계엄하에서 삼엄한 포위망을 쳤는데 어떻게 그런 경계를 뚫고 북한군이 대량 침투한다는 것이냐며 헛소리하지 말라는 식으로 통박했다. ‘이성적으로’ 랄 것도 없이 가만히 따져보면, 뚜렷한 입증이 아닌 “그랬다더라”, “들었다”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막연함을 읽을 수 있음에도 ‘카더라’는 반복효과를 노리는 어둠의 세력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있는 것이다. 
5공 청산 과정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12.12쿠데타와 5.18 학살의 주범들은 ‘북괴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는 등 당시의 매도가 과장된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법정에서 시인했다. 대법원은 모든 자료와 정황을 판단해 1997년 4월17일 그들에게 내란죄 등을 적용, 최고 무기징역까지를 선고했다. 신군부가 권력 찬탈을 위해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사실이 법적으로도 명백하게 확정된 것이다. 그들에게 ‘내란 선동죄’로 사형당할 뻔했던 김대중 씨는 나중 다수 국민의 신임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5.18 항쟁의 사료들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 문화유산이 됐다. 그런 명명백백한 근거들을 알면서도 무슨 트집을 잡을 건더기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반성하고 트집을 잡아야 할 것은 과거청산의 흐릿함이다. 법적으로는 청산했다하나 정신적으로, 온정적으로, 또 차별적 감정으로 완벽히 청산하지 못하는 우리의 청산문화를 뜯어고쳐야 한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자들을 뒤늦게 단죄하고도 ‘정치보복을 없앤다’는 화해를 명분으로 곧 이어 사면해줬다. 피해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관용을 칭송하기에는, 지금까지도 반성없이 발호하는 그들의 뻔뻔한 모습들이 너무 심한 후회와 후유증을 낳고있다. 
사람은 흔히 자기를 합리화한다. 특히 자신의 허물이 있을 경우에는 기를 쓰고 덮고 뒤집으려 한다. 그 것은 궁지에서의 생존을 위한 호신 본능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나치면 사회악, 역사를 비트는 패역이 된다. 권력을 이용해 수천억을 뱃속에 넣고는 나랏돈 1672억원을 안내고 버티는 ‘배 째라’에, 무리를 이끌고 골프장을 활보하는 철면피는, 카리스마가 있다는 사내대장부가 아니라 그야말로 29만원 졸장부요 사회악이라고 할 밖에. 그리고 엄연한 5.18 항쟁사 마저 뒤집으려고 기를 쓴다. 과오를 철저히 처단하지 못한 탓이다.
 
어디 비단 5공의 주역들 뿐인가. 멀리는 일제에 부역한 자들을 철저히 청산하지 못한 때문에 민족정신을 흐리는 역사왜곡 시도들이 상시 고개를 든다.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려 하고, 일본천황에게 혈서를 쓴 투철한 친일과 남로당에 몸담았던 좌익행적도 문제시했다가 오히려 몰매를 맞는 모순 투성이 역사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괴이쩍은 합리화-. 역사의 고비마다 청산과 완결없이 두루뭉수리 넘어가는 우리네 ‘좋은 게 좋고’ ‘힘센 놈이 최고’라는 흐리멍텅 청산문화가 지금의 갈등과 적대의 원류라고 해서 틀리지 않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