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정치개입 의혹을 수사중인 검찰이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두 차례 불러 조사하고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를 압수수색하는 등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정원 직원이 인터넷 게시글이나 댓글을 달아 대선에 개입한 것도 문제지만 경찰이 이를 축소수사하고 증거인멸까지 했다면 사안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경찰의 축소수사 의혹은 경찰 내부에서 먼저 제기됐다. 경찰은 지난해 대선 직전 국정원 직원이 선거에 개입한 댓글을 단 흔적이 없다는 취지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대선 뒤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은 경찰 수뇌부가 수사를 축소하기 위해 외압을 행사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수사팀은 하드디스크 분석을 위해 대선 관련 키워드 78개를 제시했지만 서울경찰청은 4개의 키워드만을 분석한 뒤 댓글이 없다고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 전 청장이 수사 상황을 파악하면서 외압을 행사했다는 게 의혹의 핵심이다. 검찰이 김 전 청장을 지난 21일에 이어 25일 다시 불러 조사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검찰 수사에 대비해 경찰이 증거를 조직적으로 인멸했다는 의혹도 충격적이다.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소속 한 팀장이 지난 20일 검찰의 압수수색 직전 하드디스크에 있던 자료를 삭제했다고 한다. 팀장은 검찰에서 윗선 지시는 없었고 단순 실수라고 했다는데 사이버수사대 팀장이 실수로 파일을 지웠다면 누가 믿겠는가. 과거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불법사찰 증거인멸 사건 때도 직원의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했다가 들통난 적이 있다. 축소수사도 문제지만 경찰의 조직적 은폐 의혹도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대선 때 투표일을 불과 사흘 앞둔 한밤중에 경찰이 급작스레 국정원 직원이 댓글을 단 흔적이 없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한 것을 두고는 고개를 갸웃거린 사람이 많았다. 무언가 의도가 있지 않고선 그런 식으로 발표할 수 없다는 건 상식이다. 이 모든 과정의 핵심에 김 전 청장이 있었다는 게 내부의 폭로인데, 만약 사실이라면 철저히 진상을 규명해 엄중히 책임을 물을 일이다. 조직적으로 증거인멸까지 이뤄졌다면 경찰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다.
검찰이 이번 수사에서 경찰에 대한 해묵은 감정을 가지고 화풀이식 수사를 할 일은 아니다. 국정원과 경찰의 정치 개입 의혹이 사실이라면 국기를 문란케 하는 중대 범죄에 해당한다. 검찰은 사명감을 가지고 다시는 권력기관의 정치 개입이 없도록 사건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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