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12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에서 열기로 했던 고위급 당국회담이 일단 무산됐다. 이유는 수석대표의 격을 둘러싼 이견이다. 장소와 일정, 의제까지 다 합의해 놓고도 회담이 무산된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북쪽보다는 처음부터 무리한 요구를 한 우리 정부에 더 큰 책임이 있다.
정부는 애초 장관급 회담을 하자고 한 직후 북쪽의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해야 한다는 뜻을 비쳤다. 정부는 9일 열린 실무회담에서도 김 부장의 참석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회담이 다음날 새벽까지 늦어지고, 장관급 회담이라는 이름도 당국회담으로 바뀌었다. 김 부장이 참석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정부는 어제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하는 명단을 북쪽에 전달했다. 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수석대표로 제시한 북쪽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논의는 더 진행되지 못했다. 6년 만에 재개될 예정이던 고위급 회담이 사실상 정부 스스로 만든 장애물에 걸려 좌초된 셈이다.
정부 태도는 여러모로 문제가 있다. 김 부장은 정부가 아니라 당에 소속된 사람이다. 정부 당국자 사이의 회담에 김 부장의 참석을 집요하게 요구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 김 부장을 꼭 대화 상대로 하겠다면 애초부터 장관급 회담이 아니라 다른 이름의 회담을 제의했어야 한다. 과거에도 김 부장의 상대는 국정원장 등이었고, 통일부가 없는 북한은 장관급 회담에 협상 능력이 있는 ‘내각 참사’ 등을 참석시켰다. 정부가 이를 잘못된 관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전의 여러 회담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또한 하는 일과 권력으로 볼 때 김 부장은 부총리급 정도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정부는 아마도 개성공단 가동 중단을 주도한 김 부장을 참석시켜 직접 책임을 따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개성공단 문제는 누가 대표로 참석하더라도 논의할 수 있다.
지금 남북 관계는 수석대표 문제로 끝까지 기싸움을 벌일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개성공단 정상화가 빨리 이뤄지지 않으면 장기 폐쇄로 갈 가능성이 크다. 최근 관련국들이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는 한반도 비핵화 노력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남북 회담에서 직접 북한 핵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비핵화 대화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담이 열리지 못한다면 남북 관계가 오히려 비핵화 대화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과거 방식은 무조건 잘못이라고 해서는 남북 대화가 이뤄지기 어렵다. 정부가 말하는 신뢰와 원칙이라는 말이 이런 식으로 잘못 쓰여서는 안 된다. 이제라도 무리한 주장을 철회하고 해법을 찾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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