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아이들의 대화

● 칼럼 2013. 9. 1. 18:56 Posted by SisaHan
아들만 둘을 키우다 보니 우리 집에는 늘 아이들의 친구, 머슴아들이 벅적거린다. 고등학교 때는 밴드 연습을 한다고들 모여 한참 소란을 피우다 배가 고파지면, 모두 부엌으로 올라와 피자도 시켜먹고, 햄버거도 구워 먹는다. 남자아이들이 모이면 늘 대화는 여학생들의 이야기다. 부엌 구석에서 슬며시 귀를 기울이는 나의 귀에 제일 많이 들리는 문장은 “Is she hot (뜨거운 여자냐)?” 하는 질문이거나, “Wow, she is so hot (와, 그 여자애 뜨거워)” 하는 감탄사이다. ‘뜨거운 여자’라니, 아마도 얼굴이 예쁘다거나, 몸매가 날씬하고 멋있어 보이기만 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는 뜨거움을 가져다 주는 그런 아가씨라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들아이는 토론토에서 5시간이나 떨어진 오타와에 있는 대학으로 갔다. 나는 수시로 토론토와 오타와 사이를 오가며 아이를 데려오기도 하고, 이사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 때도 오가는 길에 늘 6척씩 되는 아이의 친구들을 밴에 가득히 싣고 다녔다. 이미 성장하여 20세가 넘은 청년들도 이야기는 여전히 여자 친구들을 향할 때가 많다. 몇 시간씩 어두운 밤 길을 달리며 이야기 꽃을 피울 때는 뒷좌석 구석에, 혹은 운전석에 엄마가 앉아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 진지하다. 그런 시간에 내 귀에 자주 들려오는 질문은 “Is she high maintenance?” (그 사람 관리가 힘든 여자냐?)였다. ‘관리가 힘들다’니, 아마도 너무나 감정이 여려 늘 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라든가, 아니면 취향이 고상하여 비싼 명품을 선호하거나, 좋은 식당에만 만족을 하여 경제적인 부담이 많아지는 아가씨라면 관리가 힘든 아가씨가 아닌가 생각된다. 재미있는 것은 청년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아가씨가 그리 까다롭지 않고, 맘에 들 경우에 그들은 “Oh, no, she is cool” (아니, 그녀는 시원해) 라고 답하였다. 몇 년 전엔 뜨거운 아가씨들을 좋아했는데, 이젠 시원한 아가씨들이 선망의 대상이다.
 
나 혼자 불쑥 ‘뜨거운 아가씨’와 ‘시원한 아가씨’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 얼굴과 몸매가 예뻐 남의 눈에 띄는 것은 타고날 때 이미 정해진 모습이니, 그 아가씨 스스로가 만들어간 일은 아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공부하러 온 여학생들이 모인 자리에 같이 하게 되었다. 소재 중의 하나가 쌍꺼풀 수술을 했던 경험담들이었다. 나에겐 너무나 생소한 화제이니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경험을 이야기하는 두 학생 모두, 중학교 때 부모님들이 내린 결정이고, 외모가 남에게 빠지지 않아야 자신감이 생긴다고 하셨단다. 이제는 타고나지 않아도 뜨거운 아가씨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가씨가 시원하다 (cool) 라는 말은 성장 하면서 형성된 아가씨의 내면을 일컫는 말 일 것이다. 한 사람의 심리상태, 사고방식, 생활 습관은 자라면서 형태를 갖추어가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한 아가씨 속에 겹겹이 쌓인 모습이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십대들이 많이 쓰는 말들을 분석하면서, 그들이 쓰는 ‘cool’ (시원하다) 이라는 말이 어떤 경우에 어떻게 쓰이는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cool’하다는 말의 대표적인 의미는 ‘상관하지 않는다’, ‘개의치 않는다’라는 말이라 했다. 이곳의 청년들이 편안하게 생각하며, 친구로, 반려자로 선망하는 시원한(cool) 아가씨들은, 자신의 마음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남자 친구에게 감정을 의탁하지 않고, 겉에 보이는 작은 일들이나 남의 눈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아가 당당하고, 개성이 있는 사람들이라 추측된다.
 
딸들에게 쌍꺼풀 수술을 해주는 부모들의 바람도 딸을 자신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cool 한 아가씨가 되려면 우선은 예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그 중에는 노력을 하면 못 이룰게 없다는 긍정적인 생각도 엿보인다. 그런가 하면 이곳의 청년들은 남의 기대에 개의치 않고 제 나름대로 자유롭게 cool한 아가씨 상을 갖고 있다. 청년들이 맘에 품고있는 아가씨들은 각양각색이다, 그래서 차 안에서 몰래 듣는 연애 담은 더 흥미롭고 재미있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계절이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태우고 학교로 향하는 시간이다. 아들아이는 cool한 처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나는 이 계절이면 예전 아이들의 대화를 훔쳐 듣던 시간들을 그리워한다.

< 김인숙 - ‘에세이 21’로 등단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심코 가톨릭교육청 언어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