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손맛을 추억하다

● 칼럼 2013. 11. 25. 19:38 Posted by SisaHan
남편은 한동안 아무 대꾸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말뜻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잠시 후 그의 노력이 안쓰러워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이번 주 토요일 세시에 김장하러 같이 가야해.” 남편이 망설이는 이유는 강제 소집형 문장때문이 아니다. 그 의미앞에서 당황해 하고 있는 것인데 나는 그를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고백하건대 결혼하고 스물 여덟해가 지나도록 한번도 김장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대화는 남편에게 생소하다. 잠시후 “김장 ? 어디로 ?” 장소가 이 예상밖의 문장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꺼란 생각이 들었는지 그가 입을 떼었다. “ X마켙에…”어렴풋이 그림이 그려지는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것이 최강급의 거절 ? 조바심에 내가 재빠르게 덧붙였다. “배추도 다 저려주고, 속도 다 되어 있어서 우린 그냥 배추속 넣어 통에 담기만 하면 되니까 식은 죽 먹길꺼야. 나 꼭 해보고 싶었어.. 옛날 생각도 나고, 재미있을 것 같지 ?”추억을 빙자한 회유가 맞다. “음…….알았어” 어라 ? 이게 뭐지 ? 그의 폭발적인 호응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한번에 오케이 사인을 보내리라는 건 정말이지 상상하지 못했다. 이제 내가 궁금해졌다. 남편이 이 뜻밖의 초대를 순순히 받아들인 이유는 뭘까 ? 그동안 워킹맘이라는 핑계로, 뭐하러 애써 김치를 담느냐는 주위 의견을 적당히 편리하게 받아 들이던 내가 김장 이벤트에 가슴뛰며 참가 신청을 하게 된 이유는 또 뭘까 ? 그건 아마도 김장에 담긴 추억때문이 아닐까 싶다.
 
단골 야채상에 속이 꽉 찬 배추, 무우를 미리 주문해 놓는다. 김장날은 어김없이 첫 추위가 온 날이거나 첫 눈발이 내린 날이다. 김장거리들은 리어카에 실려와서 마당 한쪽에 산처럼 쌓인다. 춥다. 배추에 칼집을 내서 쭉 뽀개어 소금을 뿌려가며 저려놓고 무우채, 파, 마늘,젓국에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려 배추속을 만드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다. 정말 춥다. 남자들은 미리 땅을 파서 독을 묻고 독을 다독여줄 짚을 준비한다. 배추가 적당히 절고 나면 씻어 건져 놓고, 둘러 앉아 배추 속을 넣어 땅에 묻힌 김치독에 담는다.. 너무 춥다. 엄마는 커다란 통에 돼지 고기를 삶는다. 저려진 노란 배춧잎에 김이 모락 모락 피어오르는 돼지고기 한점 놓고, 새우젓과 무우생채를 넣어 싸먹던 그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추워도 김장 마당 한쪽에서 잔 심부름을 해야 할 이유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엄마는 보쌈을 한 접시씩 이웃에 돌리게 했다. 이웃들도 김장을 하면서 보쌈 접시를 보내왔다. 이집 저집 그 해 김장 맛을 다 돌아가며 맛볼 수 있는 행복한 동네 잔치였다. 김장이 끝나면 어김없이 엄마는 며칠씩 앓아 누웠었지만….
 
배추는 잘 저려졌고 속은 넉넉했다. 아침부터 김치통을 씻어 준비하고, 앞치마, 일회용 장갑을 찾아 넣고.. 큰 일을 앞둔 듯 분주하게 서두르는 내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남편이 빙글거리며 말한다. “이거 김장이라고 할 수 있는거야 ?” 나도 안다. 그럼 그냥 그리운 맛을 찾아 떠나는 추억 여행이라고 부르지 뭐. 그 식품점 김치를 사다 먹곤 했으니 그곳에서 준비한 김치 재료로 만든 김치는 그냥 그 맛이겠지. 김치맛까지 보장되는 이 즐거운 수고는 손해볼 게 하나도 없는 거겠지. 앞치마를 두른 남편도 재미있는지 큰 손으로 배추 한쪽을 잡고 슥슥 속을 넣으면서 가는 길에 잊지말고 돼지고기를 사야한다고 확인을 한다. 김장은 30분도 안걸려서 끝났다. 좀 섭섭하기까지 했다. 앞의 수고를 다 잘라낸 미니 김장행사였지만 나와 남편에겐 오래된 추억을 다시 꺼내보게 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좀 익혔다가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김치 한포기를 잘랐다. 이럴 수가.. 이건 우리가 사다먹던 그 식품점의 김치맛이 아니었다… 어느 추운 한해 엄마가 담가 김치독에 넣어 두었던 오래된 그 맛이었다. 남편도 믿을 수 없어 하더니 자기 손을 번쩍들고 결론을 내려주었다.. “이건 바로 내 손맛이야 !” 손맛, 가족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던 엄마들의 간절한 마음은 고향처럼 잊을 수 없는 맛으로 우리 기억에 남아 오래 오래 전해진다는 것은 그럼으로 진실이다. 김치를 담그며 생각했던 가족들과 오래 전 추운 겨울날의 따스한 기억들과 남편과 나누었던 몇조각의 웃음이 담겨진 우리의 첫 김장은 이렇게 그리운 손맛을 다시 찾게 해주었다 . 

< 김유경 시인 - ‘시.6.토론토’동인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