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정의구현사제단을 이적단체로 몰아가고 있군요. 국무총리는 북에 동조하는 행위라고 규정했고, 대통령은 모든 분열 책동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호통을 쳤습니다. 지학순 주교를 구속시키던 유신정권이 그러했죠.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의 ‘밀가루 봉변 사건’을 두고 마치 나라가 결딴난 것처럼 호들갑 떨던 일도 생각납니다.
사제단에 대한 국적 시비가 나왔으니 한번 따져봐야겠습니다. 사실 이런 시비는 언제나 있었죠. 이명박 정권 때 정운찬 총리는 ‘천안함 폭침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참여연대를 두고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죠. 이번엔 연평도의 우리 국민과 국군에 대한 북의 폭격 사건을 두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역지사지의 자세로 판단해보자는 것이었으니 논란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제단은 1974년 유신정권의 폭력성이 극악을 떨 때 결성됩니다. 직접적으론 지학순 주교의 구속이 계기가 되었죠. 지 주교는 정권이 대대적으로 과장 조작한 민청학련 사건 연루자에게 금전적 지원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됩니다. 이에 대해 지 주교는 7월23일 양심선언을 합니다. “…첫째 유신헌법은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무효이며 진리에 반한다, 둘째 유신헌법은 인간의 양심을 파괴할 것이다, 셋째 긴급조치 1, 4호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자연법 유린의 하나다, 넷째 죄목인 내란 선동은 조작된 것이다, 다섯째 비상군법회의는 꼭두각시다.” 그는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형에 처해집니다.
양심선언 다음날 신부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원주에서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자리의 결의는 이랬습니다. “정치 현실에 대한 의사 표시를 ‘사회 구원의 원리’에 입각한 사목행위의 하나로 펼친다.” 사흘 뒤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이름의 첫 시국성명이 발표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위대한 존엄성과 소명을 믿는다”로 시작하는 이 성명은 비판만으로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유신헌법의 폐지와 민주헌정의 회복을 다짐합니다. 그것이 사제단이 탄생한 배경이고 사제단의 성격입니다. 사제단은 그해 말까지 63차례의 시국성명을 발표하고 시국미사를 집전하는 등 유신정권과 정면대결을 했습니다. 사제단은 민주공화국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탄생했고, 이를 위해 지금까지 풍찬노숙을 주저하지 않았고, 투옥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국적을 따지자면 사제단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국민이요, 이들을 억압한 집단은 절대왕정의 유신체제 신민이었습니다.
 
한반도 남쪽엔 대한민국이, 북쪽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습니다. 남북 모두 국명이나 헌법에 ‘민주공화국’임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따져보면 그 성격이 달라집니다. 북쪽은 3대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는 봉건왕조의 성격이 강합니다. 남쪽은 최소한 국민이 자신의 대표를 직접 민주적으로 선출하는 절차를 헌법과 법률에 규정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민주공화국으로서 요건은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면 이 헌정질서는 부단히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무력화시키고 파괴하려는 권력집단과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세력 간의 갈등과 충돌로 점철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남쪽엔 진정한 민주공화정을 희구하는 시민과 절대왕조 성격의 전체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집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씨 왕조를 꿈꾸던 이승만 정권, 유신왕국을 꿈꾸던 박정희 정권이 그랬습니다.
따라서 ‘조국이 어디냐’는 질문의 선택지는, 남북 양자택일이 아니라 민주공화정과 봉건왕조형 전체주의여야 합니다. 사실 유신정권은 세습만 안 이루어졌지 북쪽과 전체주의적 성격은 오십보백보였습니다. 선택지를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 이 정부의 성격 때문입니다. 분명히 민주적으로 선출됐다고 하지만, 선출 과정에 치명적인 하자가 있었습니다. 국가기관이 선거 과정과 국민의 선택을 교란했습니다. 출발이 그러했으니 민주성을 의심해야 합니다. 또 이 문제를 논의하고 풀어가려는 과정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있습니다. 전체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단의 조국을 따지는 이들에게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는 당신?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국민인가, 봉건적 유신왕조 백성인가.
 
지난해 12월13일 대통령선거가 막바지로 치닫던 중 박근혜 후보는 갑자기 지학순 주교의 묘소를 참배합니다. 검은색 예복에 흰색 장갑을 끼고 헌화 분향한 뒤 3분 남짓 묵념을 했습니다. 꽤나 당혹스런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이 박 후보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아버지의 잘못에 대한 반성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유신왕정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국민으로서 마음가짐을 새로이 한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바로 그 순간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들이 과거 독재정권 때처럼 선거공작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국가 비밀문건을 왜곡해 상대 후보를 종북으로 낙인찍고, 인터넷과 트위터를 통해 온갖 흑색선전 찌라시를 살포했습니다. 대표적인 내용이 이런 것입니다. ‘1번(박근혜 후보) 대한민국, 2번(문재인 후보) 북조선인민공화국’. ‘문재인의 주군은 김정일’. 당신의 조국은 어디인가라는 폭력적인 질문도 사실 그 연장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부정선거를 따지는 국회의원에게 ‘종북하지 말고 월북하라’고 고함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대한민국은 국민주권을 농락하고 권력을 도둑질해 가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절대왕정을 꿈꾸는 전체주의자들의 나라도 아닙니다. 국민이 주인 되고, 여러 색깔 여러 생각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민주공화국입니다. 북한이 김씨의 왕조라고, 남쪽 또한 특정 가문과 족벌의 나라가 될 순 없습니다. 그걸 꿈꾸는 사람들이야말로 이 땅을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원조 사제단’ 앞에서 긴 시간 참배했던 당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 한겨레신문 곽병찬 대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