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테스트

● 칼럼 2013. 12. 2. 17:59 Posted by SisaHan
영어의 ‘테스트’라는 말은 두 가지로 쓰여진다. 하나는 우리 말의 ‘시험’이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검사’라는 뜻이다. 오늘 토론토의 한 라디오 방송에서는 하고 싶지 않았던 ‘테스트’를 해야했던 사람들의 경험을 나누는 방송을 하고있다.
 
한 이십 대의 젊은 아가씨 차례가 되었다. 그녀의 엄마는 ‘헌팅턴’이라는 불치의 병을 앓았다고 한다. 헌팅턴이라는 병은 유전으로 전해지는 병으로 뇌의 신경들이 조금씩 죽어가는 병이다. 기억력을 잃는 치매 증상으로 시작 하지만,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천천히 사고력, 감정을 조절 할 수있는 능력은 물론 몸의 근육을 움직이는 능력까지 모두 잃어가는 무서운 병이다. 아가씨는 자신이 열 한살 때 아직 젊었던 엄마는 이미 양로원에 들어가 살아야 했고, 아빠가 딸을 혼자 키우고 아픈 아내도 돌보면서 어려운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 한다. 헌데 헌팅턴 병을 앓는 환자의 자식들은 그 병을 물려받을 확률이 50%나 된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은 유전자 검사를 통하여 환자의 자식 중에 누가 병을 앓을 인자를 보유하고 있는지 알아 낼 수 있다. 그래서 헌팅턴 병을 앓는 사람의 자식들은 모두 유전자 검사를 받기를 권유한다. 지금 방송 중인 아가씨도 오랜 세월 생각은 하면서도 정말 그 검사만은 받고싶지 않아 미루며 살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아가씨도 구체적으로 앞날을 생각 할 때도 되었고, 남자친구도 생겨 미래를 같이 꿈꾸게도 되었다. 이제 삶의 모든 결정은 자신이 병의 인자를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하였다. 어느 날 아가씨는 검사실의 문을 두드렸다.
 
한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다는 일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나의 마음도 떨리기 시작한다. 검사는 끝나고 아가씨는 며칠 후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다시 의사와 만나기로 한 날은 아빠와 남자친구가 동행했다. 작은 방에서 의사를 기다리는 시간은 한없이 길었고 비장한 긴장과 정적이 숨을 조여오는 시간이었다. 젊은 여자 의사가 누런 봉투를 들고 방으로 들어선다. 조심스레 의자에 앉는 의사의 얼굴을 훔쳐보면서 눈이 마주쳤다. 의사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다음 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의사는 무언가 말을 했으나 그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기억이 없다. 의사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고, 아빠와 딸은 끌어안고 오열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끝낸 아가씨는 말을 이어가질 못한다. 몇 초의 침묵이 흐른다. 라디오의 정적은 한없이 길게만 느껴진다. 아가씨의 평범한 삶은 라디오의 소리가 멈추었을 때 함께 끝나버린 것 같다. 그것이 2년 전에 생긴 일이었단다.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고, 마음에 맞는 청년과 결혼도 하고 딸을 하나 낳아서 키워보고 싶었던, 또 그 딸과 셋이서 멀리 여행도 다니는 꿈을 꾸던 아가씨는 어디론가 멀어져 갔다. 그 짧은 시간에 그녀는 검사의 결과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몇 군데 검사실을 더 찾아 다니기도하고, 엄마에게 주어진 불행이 모자라 자신에게 까지도 이런 어려움을 겪게하는 신에게 불 같은 울분이 일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거쳐간다는 그 절절한 슬픔을 삭이는 계단들을 지나며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떠나 보냈다.
 
이제 다시 차분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계속된다. 요즈음의 생활을 그녀는 “괜찮다”고 이야기 한다. 무엇보다도 아빠와 남자 친구는 물론, 자신에게 부어지는 주위 사람들의 사랑으로 자기는 앞으로 오랜 동안 지금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가리라는 확신이 있다고 말한다. 진단이 내려지자마자 병원에서는 상담자를 지정해 주었고, 그 상담자는 아가씨의 건강을 지금부터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의료시설과의 연결은 물론이고, 그녀가 의미있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중개역도 해주었다. 그 일 중의 하나로 아가씨는 헌팅턴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연구하는 기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아가씨는 이미 반은 전문가가 된 사람 모양 병과 관련된 정보도 많이 알고, 앞으로 자신이 아기를 낳으면 염색체 치료를 통해 그 아이는 자신과 같이 병을 물려받을 필요가 없다고 활발하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녀는 이제 병원이나 양로원에서 간혹 헌팅턴 환자를 봐도 전처럼 가슴이 아프지 않다고도 한다. 그의 말에는 자신만이 간직한 작은 희망의 싹이 숨어 있는 듯 들린다. 나는 딸과 같은 젊은 아가씨가 접한 불행을 들으며 가슴이 저며오는 연민을 느꼈다. 지금 처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며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아픔은 위안으로 대처됨을 느낀다. 후에 아가씨의 삶이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힘들어진다 하여도, 지금 그에게 친지와 가족은 물론, 의학계의 전문의들이, 사회의 시스템이, 모두 같이 “당신의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도 있는 힘을 다 합니다” 하고 말하는것 같아 고맙기 짝이없다. 이렇게 극한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삶은 언젠가 한번은 남에게 의존하고, 남의 사랑과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궁극적인 ‘테스트’는, 온갖 시험에 합격을 하여 많은 것을 쌓아가는 것 보다는, 우리는 모두 언제라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멍에를 안고 살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래서, 남의 불행을 같이 헤쳐가는 일을 몸에 배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김인숙 - ‘에세이 21’로 등단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심코 가톨릭교육청 언어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