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가 지난달 29일 내년 고교 신입생이 사용할 한국사 검정 교과서 8종 가운데 7종에 대해 41건의 내용 수정을 명령했다. 친일·독재를 미화한 교학사 교과서의 문제를 희석시키려고 다른 교과서를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과거 독재정권 시절 국정 교과서 체제에서나 할 수 있는 조처를 취한 것이다. 권력층의 입맛에 맞춘 반역사적·반교육적 행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수정명령 항목 가운데 가장 많은 내용은 북한과 관련된 부정적 기술을 늘리라는 것이다. ‘북한의 토지개혁 당시 농민이 분배받은 토지에 소유권의 제한이 있었음을 서술’ ‘북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실례 제시’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에 대한 구체적 서술’ 등이 그것이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될 내용을 상술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한국사 교과서를 반공 교과서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과거 정권의 그릇된 행태를 비호하려는 내용도 여럿이다. ‘피로 얼룩진 5.18 민주화운동’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다니!’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정부’ 등의 소제목에 대해 “교과서에 사용되는 용어로 부적절하다”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교육부는 ‘각계에서 추천받은 전문가로 수정심의회를 구성해 논의했다’고 하지만 수정심의회는 법적 기구가 아니며 이들 전문가가 어떤 사람인지도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들이 학계 권위자라면 공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역사인식은 정부의 명령이 아니라 학계의 폭넓은 논의를 바탕으로 해야 제대로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수정명령권을 남용하는 교육부의 행위 자체가 필자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검정제도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초·중등교육법의 시행령인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에 수정명령권을 둔 것이 포괄위임 입법을 금지하는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계속돼왔다.
8월 말부터 시작된 한국사 교과서 논란의 핵심은 친일·독재를 노골적으로 미화하는데다 질적으로 수준 미달인 교학사 교과서의 퇴출과 검정 관련자들에 대한 적절한 문책이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이 교과서를 옹호하면서 다른 교과서의 문제를 침소봉대했다.
 
나아가 교학사 교과서와 연관된 사람을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여권 주요인사들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앞다퉈 주장했다. 교과서 문제를 잘 짜진 정치적 목적의 역사전쟁 도구로 삼은 것이다.
학생들의 역사인식을 권력층의 뜻대로 끌고 가려는 시도는 즉각 중단돼야 한다. 교학사 교과서의 검정합격을 취소하고 부당한 수정명령은 철회돼야 한다. 그것만이 지난 몇 달 동안 되풀이된 잘못을 바로잡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