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화목한 교회를 꿈꾸면서

● 칼럼 2013. 12. 8. 19:34 Posted by SisaHan
나이가 들고 이제 교회에다 간접적으로 은퇴의 시기를 말해놓고 나니 자꾸 과거를 회고하게 되고 또는 예전에 내가 가졌던 꿈은 이루었던가? 또는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섰던가? 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젊은 시절 신학교를 다니면서 강단에 올라 사자후를 토하면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말씀 앞에 꺼꾸러지는 장면들을 연상하지 않았던 목사가 어디 없으랴? 대단한 설교자 또는 부흥사, 대형 교회 웅장한 건물을 꿈꾸며 한 시대를 준비해왔다. 그러면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캐나다의 이민 목회자로 섰다. 물론 그 와중에 한국이나 미국에서 목회할 기회도 있었으나 이제는 캐나다에서 내 목회를 끝낼 것 같다. 

그런데 목회의 종반에 와서 과연 큰 교회 많은 성도 대단한 설교자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결국 그 모든 것은 목회자 개인의 명예나 영광과 같은 것이 되겠고 진정 성도들이 마음을 담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신앙인의 삶을 키우는 목장으로서의 교회와 그 교회를 책임지는 목사로서 온전하게 살았을까? 하는 질문 앞에서 엄숙해진다.

꼭 목회의 종반을 앞 둔 시점에서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나는 십여 년 전부터 교회와 목회를 자주 생각하면서 교회가 크고 재정이 많고 유명인사가 많은 교회도 좋겠지만 아무리 교회가 크고 재정이 많다 해도 교회가 시끄럽고 분쟁에 휘말리고 강단에 오르는 목사를 끌어내리고 목사나 장로가 법정에서 만나는 모습을 볼 때 이건 교회도 아니고 목회도 아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교회는 화목해야하겠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실제로 교회가 화목하지 않으면 성도들이 교회에 오면 이 편 저 편에 눈치를 봐야하고 제직회는 갈등 속에서 편한 회의가 되지 못한다. 서로를 꼬집고 비난하고 회의록에 사인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로 옥신각신을 하고… 이건 교회가 아니다. 세상 사람이 하는 방식을 그대로 쫓아 법정 다툼이나 벌이고 있으니 은혜는 뭐며 용서는 뭔가? 이제는 복음을 위한 순교가 아니라 순교적인 자세로 싸움을 하는 교회가 된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설교 시간에 우리 성도들에게 예전에 우리가 많이 불렀던 동요, ‘이슬비’를 함께 읊을 때도 있었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골목길에 우산 셋이서 어깨를 마주대고 나란히 걸어갑니다.”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이 빨간 우산을 들 수도 있고 파란 우산을 들 수도 있고 코카콜라 회사에서 제공한 우산을 들 수도 있다. 교회는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리고 그 교회에는 찢어진 우산과 같이 인생이나 사업이 그리고 성품이 찢어진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도 용인하면서 함께 인생의 길 교회생활을 해야 한다.

몇 년 남지 않은 나의 목회라 해도 나는 절대적으로 이것을 강조한다. 제발 큰 교회나 많은 재정에 욕심을 내지말고 온화하고 화평한 교회를 이루는 목회를 하면 어떨까? 하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심방을 해도 화(요일)과 목(요일)에 심방을 한다. 물론 다른 날도 하지만.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