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가 선고되자 법정에선 한숨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보였다. 정작 강기훈씨는 웃지도,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지난 23년간 그는 유서 대필로 동료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죄로 징역을 살았고, 누명 속에 어머니를 잃고, 건강을 잃었다. 남은 건 암으로 수척해진 쉰 살의 병든 몸이다. 재심 재판부는 1991년 당시의 증거를 믿을 수 없다고 이제야 밝혔지만, 검찰은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간 이웃 법정에선 1976년 ‘서울대 의대 간첩사건’의 9명에게 60대가 된 38년 만에 무죄가 선고됐다. 같은 날 부산에선 50대 중반이 된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모두 수사기관의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가 무죄 이유였지만, 부림사건의 담당 검사였던 이는 되레 “좌경화된 사법부”를 탓했다.
서른세 살의 유우성씨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으로 하마터면 그렇게 고통의 세월을 살 뻔했다. 그나마 1심에서 국가정보원의 수사 결과가 믿을 수 없는 증거로 판명돼 무죄를 받았다. 항소심에서 검찰은 중국 공문서들을 증거로 내놓아 반전을 시도했지만, 중국 정부는 이들 문서가 ‘위조’됐다고 밝혀왔다. 조작 사건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유씨 역시 훗날 눈물조차 마른 채 재심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이제 일은 커졌다. 문서 위조 경위를 수사하겠다는 중국과의 문제도 간단치 않거니와, 증거 조작을 의심받는 검찰과 국정원은 존립 기반이 흔들리게 됐다.
검찰은 “국정원이 준 문서”라고 변명했다. 몰랐다는 얘기다. 정말 몰랐을까. 부림사건의 한 피해자는, 검사들이 수사 현장에도 왔었다고 증언한다. 그는 “시멘트 바닥에 군복을 입은 아이들이 초췌한 몰골로 있는데, 그것을 보면 고문이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작 스물서너 살 안팎인 시국사건 대학생들의 겁먹은 얼굴과 불편한 몸에서 고문의 흔적을 눈치채지 못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1980년대 한 시국사건의 피해자는 “검사에게 멍든 자국을 보여주며 고문을 당했다고 호소했지만, 검사는 ‘증거가 되냐’며 무시했다”고 말했다. 몰랐던 게 아니라 못 본 척한 것이다.
따지자면 고문 수사나 서류 위조나 증거 조작이긴 마찬가지다. 공안 사건에선 대개 국정원과 검찰이 긴밀히 협의해 수사와 재판을 진행한다. 만약 검찰이 위조를 알면서도 ‘아귀 안 맞는 것 수정하는 일쯤이야…’라는 생각에, 혹은 그런 의심을 애써 밀쳐둔 채 증거로 냈다면 그 역시 명백한 범죄행위다. 2010년 일본 오사카에선 기소 내용에 맞춰 압수물의 날짜를 바꾼 검사는 물론, 이를 묵인하고 허위 보고한 부장·부부장 검사까지 구속 기소됐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광포하게 번진 데는 돈이 큰 이유가 됐다. 마녀로 지목되면 고문 도구 사용료, 고문 기술자와 마녀 재판관의 수당, 처형 비용까지 모두 내야 했다. 화형 뒤에는 전 재산이 몰수돼 나눠졌다. 마녀재판의 관계자들은 다 이해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고문 기술자 가운데는 바늘 끝이 뒤로 밀려나는 장치를 써서 ‘아파하지 않으니까 마녀’라고 억지 마녀를 여럿 만들어 한 재산 모은 자도 있었다고 한다.
억지 빨갱이 만들기에도 이해관계자들이 있다고 봐야 한다. 국정원이 유씨를 조사하던 지난해 초는 대선 개입 댓글 사건과 국정원 개혁 문제로 들썩이던 때다. 어떻게든 국정원의 존재 가치, 대공수사의 필요성을 입증해 위기를 돌파하려 한 이들은 없었을까. 과거 공안사건 가운데도 권력의 필요에 공교롭게 때맞춘 듯한 사건이 여럿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도록 둘 순 없다. 젊은 강기훈들이 중늙은이가 되어서야 조작의 굴레에서 풀려나는 일이야말로 다시 있어선 안 될 ‘비정상’이다. 국정원이나 검찰이 이런 일을 일상처럼 해왔다면 대수술을 서두르는 게 마땅하다. 개혁 방안이랍시고 ‘국정원 직원의 정부기관 상시 출입 금지’ 따위에 만족할 일이 결코 아니다.
< 한겨레신문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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