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소치에서 열리고 있는 겨울올림픽에서 안현수 선수가 빅토르 안이라는 이름으로 쇼트트랙 남자 1500m 동메달을 획득한 데 이어 쇼트트랙 10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개인으로서도 대단한 성취이지만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준 기쁜 소식이다. 안 선수가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고 러시아로 귀화하게 된 직접적 이유가 빙상연맹의 고질적 문제로 올림픽 출전이 막혔기 때문이었다고 하니 무척 아쉬운 일이다.
안현수 선수가 빅토르 안이라는 러시아 국적 선수로 러시아의 메달 수를 하나 더 늘리는 것을 보면서, 국적을 바꾼 안 선수의 삶에는 앞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 하는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을 해 보게 된다. 안현수 선수의 한국 국적은 그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는 순간 자동으로 소멸되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이제 그는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중간지대에 서 있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국적을 바꾸는 일이 간단치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안현수는 귀화의 조건으로 매우 좋은 대우를 보장받았고, 금메달을 딴 뒤 러시아의 국민적 환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귀화한 사람으로서 그가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문화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아 보인다. 안 선수가 동메달을 딴 뒤 기자회견에서 우리말로 질문에 답변을 하고 그의 여자친구가 통역을 했더니, 러시아 일각에서 귀화를 했으면서도 왜 러시아말을 쓰지 않느냐고 힐난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갈 안현수는 아마도 다문화인으로서 여러 문화 장벽을 맛보게 될 것이다.
며칠 전 하와이대에서 ‘한인 이민과 다문화’라는 주제로 국제 콘퍼런스가 열렸다. 그곳에는 함경도 출신 이민 5세인 중국 옌볜(연변) 학자, 카자흐스탄 한국계 4세 교수, 하와이의 한국계 이민 3세, 그리고 미국, 중국, 한국, 일본 등 각지의 이민과 관련한 학자와 전문가들이 모여 한국인이란 무엇인가를 논의했다. 보통 이민이라고 하면 이민 1세나 2세를 떠올리기 쉽지만, 세계의 한인 이민들 중에는 이민 3세, 4세, 5세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정체성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꽤 거리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1900년대 초반에 이주한 초기 이민의 후예는 한국과 단절된 상황에서 살아오면서 정체성에도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콘퍼런스에 참여한 한 발표자는 논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솔직하게 밝힌다며, “만약 운동경기에서 한국팀과 미국팀이 맞붙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아마 미국 깃발을 들고 응원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다양한 층위의 한인 사회를 고려하면 그들에 대한 효율적 정책을 마련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외국인의 귀화나 다문화 환경에 큰 변화가 생기고 있다. 우리 국적법 제5조는 외국인이 대한민국 귀화 허가를 받으려면 “국어능력과 대한민국의 풍습에 대한 이해” 등 “국민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규정하여 매우 폐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외국인 이주노동자, 다문화 가정 구성원, 또는 탈북 이주민 등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응도 여러 면에서 편견과 차별의 요소를 갖고 있다. 전통적인 우리 사회의 구성원과 다른 사람들을 널리 용인하고 그들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잡고 살 수 있도록 좀 더 넉넉한 다문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빅토르 안이 러시아 사회에 동화되어 살아가게 될지, 어느 시점엔가 다시 한국인으로 돌아오게 될지, 아니면 러시아에 살지만 정신적으로는 한국인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빅토르 안의 이민자로서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무척 궁금하다.
< 백태웅 - 미국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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