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문창극 사태’의 교훈

● 칼럼 2014. 6. 30. 16:48 Posted by SisaHan
‘문창극 막장 드라마’가 보름 가까이 이어지다 끝났다. 6일 만에 끝난 ‘안대희 드라마’에 비해 꽤 질긴 편이었다. 또 다른 ‘막장 드라마’들도 아직 진행 중이다. 이병기 국정원장, 김명수 교육부 장관 겸 사회부총리,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자 등도 문 후보자 못지않은 오점들을 안고 있다. 그런데도 연출자는 드라마 진행을 강행하고 출연자들은 꿋꿋이 버틴다. 도대체 국민의 눈높이가 어디까지 낮아지길 기다리는 것일까.
이번 사태를 지켜보는 내내 당혹감과 분노, 그리고 참담함이 교차했지만 전혀 의미가 없었던 일은 아니었다. 박근혜 정권의 속성과 기득권층의 적나라한 민낯을 볼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우선,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2기 내각 구성 과정에서 스스로 무능 정권임을 국민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청와대의 인사 검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음이 재확인됐고, 사후 대처 과정에서도 좌고우면하면서 시간만 끌다 사태를 악화시켰다. 문 후보자에 대한 국민 여론이 돌아섰으면 과감하게 지명 철회를 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자진 사퇴만 기다리다 문 후보자의 버티기에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녔다.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박 대통령의 이미지가 얼마나 과장되고 허구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번 사태를 통해 박 대통령이 꿈꾸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었던 것도 성과라면 성과다. 종교 편향에다 친일, 반민족적인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 총리, 차떼기 대선 자금 사건에 연루된 국정원장, 제자들의 논문을 자신의 연구 성과로 내세우고 연구비까지 가로챈 교육부 장관, 군 복무 중 석·박사까지 딴 안행부 장관 등으로 내각을 꾸리면 이 나라의 품격은 어떻게 될까. 굳이 나라의 품격까지 들먹일 것도 없이 그건 정상적인 정부가 아니다.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놓으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는지를 온 국민이 체감하게 해줬다.
 
이번 사태는 또, 우리 사회의 이른바 주류 기득권층이 겉으로는 그럴듯한 외피로 포장돼 있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친일적 역사관과 극우적 사고에 젖은 부패 군상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입으로는 국민을 위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그들만의 잔치를 벌여왔음도 곧 드러나게 될 것이다.
추악한 실상의 일단이 드러났음에도 남 탓만 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 넘어가려는 박근혜 정부를 보고 있노라면 오염된 언어가 풍기는 썩은 냄새로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문창극 총리 후보자에 대해 “소신 있고 강직한 언론인 출신”이라며 “그동안 냉철한 비판의식과 합리적 대안을 통해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행과 적폐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온 분”이라고 치켜세웠다. 하지만 문 후보 자신이 ‘잘못된 관행과 적폐’의 화신임을 국민은 이미 꿰뚫어 봐 버렸다. 그런데도 미사여구로 치장한 추천 이유에 대해 해명이나 사과 한마디 없이 은근슬쩍 넘어가는 뻔뻔함이 참으로 놀랍다.

중국 북송의 유학자였던 소강절은 <황극경세서>에서 “천하가 어지러워지려 하면 사람들이 말을 숭상한다. 말을 숭상하면 속고 속이는 풍속이 행해진다”며 “말이 아닌 행위를 숭상해야 천하가 다스려진다”고 했다. 온갖 교언요설로 추악한 실상과 행태를 호도하려는 요즘 세태를 되돌아보게 하는 경구이다.
그렇다고 박 대통령이 개과천선해 국민 상식에 맞는 총리 후보를 지명하고, 부패 덩어리인 장관 후보들을 교체할 것 같지는 않다. 이해관계로 똘똘 뭉쳐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무리에게 ‘정치의 목적은 사익 추구가 아니라 공공선의 실현’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올까.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은 “이해관계로 뭉친 당파의 폐습이 고질화되면 자기 당 사람이면 어리석고 못난 자도 관중이나 제갈량처럼 여기고, 가렴주구를 일삼는 자도 공수나 황패(중국 한나라 때의 이름난 목민관들)처럼 여기며 자기 당이 아니면 모두 이와 반대로 한다”고 했다.(이덕일,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의(義)보다 이(利)를 앞세우는 천박한 정치 풍토가 언제쯤 바뀌려나.
< 한겨레신문 정석구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