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주고 싶은 한 마디

● 칼럼 2014. 6. 30. 17:10 Posted by SisaHan
차고 안을 정리 하다가 빈 맥주병 상자에 눈이 갔다. 평소 같으면 우선순위로 내어놓을 터이지만 오늘은 조금 더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혹시 또 올지도 모를 그들을 위해 당분간 보관하기로 한다. 건조한 일상에 잔잔한 여운을 남기고 간 그들, 다시 기회가 온다면 기꺼이 함께 하리라는 마음에서다. 빈 맥주병으로 ……. 
몇 주 전 어느 일요일 아침이다. 밀린 일들을 처리하며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벨을 눌렀다. 나는 주말 아침의 여유를 깬 불청객을 어찌하랴 생각하며 마지못해 현관으로 갔다. 밖의 동정을 살피며 막 문을 열려는데 십여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급하게 지나가는 모습이 창으로 보였다. 안에서 주춤거리는 사이 아이는 빈집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아이를 돌려 세운 미안함에 황급히 문을 열었지만 그사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간 방향을 지켜보며 다시 올 지를 가늠하며 섰는데 가까운 거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경한 소리에 그 쪽을 보니, 까만 중형 트럭이 서행해 오고 있었고 흰 목장갑을 낀 백인 청년이 근엄한 표정으로 양쪽 주택들을 두리번거리며 뒤 따르고 있었다. 또한 그와 비슷한 또래의 말쑥하게 생긴 청년이 여자 아이를 대동한 채 건너 집들을 들락거리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이른 시간에 그토록 의미심장한 행렬은 무엇이며 동네안의 술렁임은 또 무엇인지 얼른 감이 오지 않았다. 
곧이어 나의 호기심을 자극 하듯 각양각색의 맥주병 상자를 실은 트럭이 집 앞을 서서히 지나갔다. 설마 이동식 맥주 판매대는 아닐테고 저건 뭐지? 하는 순간 호위무사 같던 그 청년이 벙글거리며 옆집에서 빈맥주병 상자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나왔다. 그제야 가가호호 돌며 빈 맥주병을 수거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유추해보니 얼마 전 다녀간 아이는 그들과 일행으로 빈병의 유, 무 혹은 주민들의 협조를 구하는 전령인 셈이었다.
 
나는 아예 자리를 잡고앉아 그들의 추이를 한동안 지켜보았다. 꽤 많은 이웃들이 그들의 바람에 호응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상자를 트럭으로 직접 날라다 주기도 했다. ‘저런 사람들이 내 이웃이었던가’ 할 정도의 생소한 이들이 담소를 나누며 열의를 다하는 모습도 보였다. 주민들의 잔잔한 움직임은 썰렁하던 골목 안에 생기를 돌게 했다. ‘이것들을 비어 스토어에 가지고 가면 몇 푼 챙길 텐데’ 하는 소심형 주(酒)군의 셈 같은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는 분위기였다. 그들이 지나는 곳은 마치 운동경기장에서 파도타기 응원을 하는 것처럼 잠시 술렁였다가 가라앉고 다시 술렁이곤 하였다. 
고요한 휴일 아침을 흔드는 그들의 행위가 과히 밉지 않았음은 물론, 그토록 높은 호응을 이끌어 내는 저력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승리의 깃발을 흔들 듯 박스를 출렁이며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며 기획성, 진정성, 차별성, 유연성 같은 단어들이 자연스레 어울려서 빚어 낸 무채색 화병 같다는 생각을 했다. 
휴일을 반납한 채 두 가족이 이루고자 한 목표는 휴가 경비 조달을 위해서 혹은 그것보다 더 절실한 무엇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목표의 경중을 떠나 한결같은 자세로 다가서는 모습이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건 저 할 탓에 달렸다.’ 던 옛 어른들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고 싶다. 더도 덜도 말고 그 모습 그대로 라면 무슨 일에서건 백발백중이라는 덕담과 함께.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