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자금 수사 결과가 발표됐다. 이상수 의원이 32억6천만원을 받아 최다액수를 기록했다. 죄가 가장 무겁다. 그런데 대통령은 감동을 받았다. 32억6천만원은 선거 때 이 의원이 대선캠프로 가져온 액수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여러 군데에서 받은 거니 조금 비어도 눈치채는 사람이 없으련만 1만원짜리 한 장 새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이 의원을 ‘마음으로 쫓기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미안해했다. 나중에 노동부 장관을 시켜줬다.
반면 어느 의원은 10분의 1도 안 되는 돈을 받았는데 대통령이 실망했다. 실제 캠프에 들어온 돈이 검찰 발표액의 절반밖에 안 된 것이다. 반은 캠프에 내놓고 반은 개인적으로 쓴 거다. 대통령은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다시는 그를 청와대로 부르지 않았다. 그 의원은 지금 ‘비노’로 분류된다. 검찰에게는 불법자금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겠지만 대통령의 판단 기준은 ‘정확한 배달’이다.


# 검찰은 2일 성완종 리스트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명단에 오른 8명 가운데 이병기 비서실장을 포함한 6명은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모두 대선자금 성격의 돈이다. 사건 초기에 6명은 다들 대통령에게 해명을 했다고 한다. 돈 받은 적이 절대 없다고. 그러니 이제 개운해진 걸까? 그저 죽은 자의 억하심정이었을 뿐인가? 아마도 가장 찜찜한 사람은 대통령일 게다. 대선 자금의 내막을 훤히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진짜 듣고 싶은 얘기는 이런 거다. “3년 전 보고드렸던 돈이 바로 성완종으로부터 온 겁니다.” 그리고 액수가 1만원짜리 한 장 빠지지 않을 때 한없는 신뢰가 솟아날 거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귀를 씻어내도 “사기꾼은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는 말이 귓전을 맴돌 것이다.


# 요즘 나라 걱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병기 비서실장이 큰 걱정이다. ‘소통의 달인’이라고 해서 비서실장에 앉혔는데 도대체 존재감이 없기 때문이다. 메르스로 난리가 나도, 유승민으로 시끄러워도 어디서 뭘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문고리 3인방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다느니, 대통령과 독대 한번 못 한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곰팡이처럼 피어나고 있다. 나도 어느 장관으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자주 전화를 걸어와 이런저런 문제를 상의했는데, 이병기 실장이 와서는 전화가 뚝 끊겼다고 한다. 어쩌다가 전화를 해도 텔레비전 저녁 뉴스에 나온 걸 두고 “어떻게 된 겁니까”라고 묻는 정도란다. 그나마 대통령이 뉴스를 보다가 전화로 물어보니 어쩔 수 없이 대신 묻는 분위기란다. 그야말로 ‘전화연결원’의 역할이다.
이병기 실장이 누구인가. 노태우 김영삼 박근혜 대통령을 만들어낸 ‘킹 메이커’다. 특히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천막 당사’를 생각해내 당을 구해낸 책사 아닌가. 그토록 출중하던 능력이 연기처럼 사라진 거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지만 난 자꾸 돈 냄새가 맡아진다.


# 근래 대통령이 사람을 피한다고 한다. 꼭 유승민, 정의화만의 문제는 아니다. 공식행사 때는 대개 접견실에 먼저 들러 내외빈과 담소를 나누고 행사장에 함께 들어가는 게 관례인데, 요사이는 시간에 딱 맞춰 행사장으로 직행한단다. 바야흐로 불신의 계절이다.
대통령은 속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성격이다. 그러니 성완종 수사가 제대로 됐는지 여부는 굳이 특검 결과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대통령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면 짐작할 수 있다. 문제가 된 김기춘, 허태열, 홍문종, 이병기, 서병수, 유정복을 만나는지, 만나면 예전처럼 반갑게 맞이하는지가 시금석이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일이 하나 더 늘었다.
< 김의겸 - 한겨레신문 디지털부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