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이 있는 날이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찻물을 올리고 수프를 끓인다. 보온병에 끓인 물을 담아 용기를 덥히는 동안 방한복이며 등산장비들을 챙기느라 한동안 부산을 떤다. 다른 계절엔 간단한 점심과 물 두어 병이면 그만인 산행 준비가 겨울철엔 여러모로 번잡하다. 잡다한 준비 과정도 그렇지만 고행에 가까운 혹한기의 산행을 잠깐 건너뛰면 좋으련만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 반문하며 묵직한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오늘의 산행지는 브루스 트레일 중 가장 인기 있는 허클리 벨리이다. 숲이 울창하고 계곡이 깊은데다 강원도의 어느 산자락을 옮겨 놓은 듯 하여 특히 애착이 가는 곳이다. 짙은 안개를 헤치며 어렵게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함께 할 일행들이 각반이며 아이젠 착용 등 산행 채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바쁜 틈사이로 맑은 미소 보내는 소중한 인연들, 거룩한 시간을 함께 할 동행들의 건강한 모습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아름드리 편백나무가 숲을 이룬 비탈길을 오르며 거칠어지는 호흡을 애써 가다듬는다. 시발점이 원만한 코스는 서서히 체력을 올릴 수 있어 무리가 없지만 오르막으로 시작하는 코스는 나만의 노하우를 가동한다. 최대한 느린 행보와 복식 호흡 그리고 지그재그로 비탈길을 오르며 온몸을 워밍업 시킨다. 찐한 향기를 뿜어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공해에 찌든 환경을 정화시켜 준다는 편백나무, 그 특유의 향기를 음미하며 몇 구비 오르내리다 보니 어느 사이 전망 좋기로 유명한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오늘은 반라(半裸)의 겨울 숲 대신 열두 폭 산수화 병풍을 펼쳐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시사철 기대했던 것보다 더 엄청난 비경으로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 오늘은 안개 낀 산야를 예비하고 있었다. 빈 벤치에 고즈넉이 홀로 앉아 대자연이 빚은 걸작을 마음껏 음미하고 싶지만 저 체온이 우려되는 겨울 산행에서는 이 또한 금물이라 눈요기로 대신하고 발길을 돌린다.
흐릿한 안개 숲 사이로 알록달록한 행렬이 이어진다. 얼마 전 우리가 본 비경 속으로 들어 온 셈이다. 간간히 들려오는 찰진 웃음소리, 푸석한 눈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 적막한 겨울 숲에 생기를 돌게 하는 작은 움직임들이 정겹다. 마치 미완성 작품에 화룡점정을 찍었다고나 할까. 자연과 합일을 이룬 광경이 흐뭇하여 나의 발걸음은 자꾸 뒤로 쳐진다.

한동안 충만한 분위기에 심취하며 걷다말고 한 생각에 빠져든다. 며칠 전 ‘삶의 목표가 희미해졌다.’는 아들의 한마디가 심중에서 맴돈 탓이다. 경쟁에서 뒤질세라 앞만 보고 달리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끝 모를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발견했음이리라. 안개 자욱한 산상에서 길을 묻는 아들에게 인생을 곱절 더 살았다는 어미는 고작 책에서 구한 몇 마디로 갈음하고 말았다. ‘삶의 의미’, ‘삶의 목표’ 이런 고차원적 물음을 품어본지 오래인 어미의 곤궁했던 답변을 상쇄시킬 깨달음을 오늘 길 위에서 얻는다.
한발 두발 오늘의 목적지를 향해 걷다보면 그 끝에 닿고, 그것들이 수없이 모여 하이커들의 영원한 숙원 히말라야에 닿는다고. 결과보다 과정에 충실하라는 평범한 진리를 건네고 싶은 어미의 간곡한 마음이다.
설한풍에도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 충분하지 않은가.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