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는 두 여인 가운데 진짜 엄마와 가짜 엄마를 명쾌하게 분별해 낸 솔로몬의 ‘지혜 재판’은 너무나 유명하다. 모정(母情)의 진수를 꿰뚫은 그 명철함이 얼마나 탁월한가. 솔로몬 왕은 그렇게 지혜로운 군주였으며 문학에도 뛰어난 인물로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룬 명군이었다.
그러나 천하의 현군이요 비범했던 솔로몬이 나중에는 패망의 씨앗을 뿌린 별 볼 일 없는 군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총기(聰氣)가 넘쳤던 솔로몬이 말년에는 사치와 부패, 백성을 괴롭힌 중과세와 노역, 이방 여자들에 홀려 우상숭배에 빠져드는 등의 과오를 저지른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머지않아 이스라엘이 분열하고 마침내 패망에 이르게 하는 불씨를 만들고 말았다. 부귀영화에 초심을 잃고 분별력을 놓치면서, 그는 자신의 전락은 물론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역사적 오점을 남긴 것이다.
사람은 처음보다 나중이 좋아야 한다. 솔로몬 처럼 나중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초반의 위대함으로 인해 명군의 반열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행운을 누리는 인물도 있긴하다. 그러나 솔로몬에 비견조차 되지않는 대다수의 범인(凡人)들은 처음에 잘 나가다가 나중에 죽을 쑤면, 그의 삶 전체에 대한 평가가 죽을 쑤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학창시절 감명깊게 읽었던 ‘단종애사’와 ‘사랑’과 ’‘흙’, ‘무정’, 그리고 ‘이차돈의 사’ 등 유명 작품들을 쓴 춘원 이광수, 그는 필력을 날리던 근대한국의 대표적 문인이었고, 2.8 독립선언서까지 기초한 반일 열혈청년이었다. 안창호와 흥사단도 만들고 활동했던 그가 갑자기 친일로 변절해 보낸 말년은 인생 전체를 추하게 덧칠하고 말았다. 어디 춘원 뿐인가. 육당 최남선, 서정주, 김동인, 모윤숙, 노천명, 주요한, 유치진… 많은 문인과 명사들이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일제 강압에 훼절하여 친일행각에 나서는 바람에, 후대에 이르러 모멸의 대상이 되었다. 을사5적 이완용을 비롯해 박영효·민영휘·윤치호·조병옥 등 수많은 정치인과 장지연·방응모·김성수 등 언론인들까지, 친일의 슬픈 한국 인물사는 삶의 초지일관(初志一貫)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전환기와 혼란기에 특히 사람의 처신이 곧아야 함을 웅변해 주는 반면교사다.
‘건국의 영웅’이라고 불릴 만큼 위세를 떨쳤던 이승만의 삶도 하나의 표본이다.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도 지낸 독립운동가에 한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그는 친일파 제거를 방해하고 한국동란에 맨 먼저 피란한 처신에 동족학살을 주도한 죄과까지 쌓았다. 그리고는 장기집권을 획책하다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타국을 떠도는 삶으로 험한 말년을 맞았다.
얼마 전 야당 국회의원들의 세계 최장기록 필리버스터, 즉 무제한 토론을 시작하게 만든 모국 국회의 정의화 의장도 끝이 나빴다는 평가가 무성하다. 그는 그동안 바르고 곧은 정치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여당 내에서 표대결 끝에 의장이 되었으니 여당의원들에게 인심을 얻었을 뿐더러,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정치적 중립을 지켜 야당의원들에게도 칭찬을 들어왔다. 청와대와 여당이 아무리 법안 직권상정을 압박해도 “선진화법에 어긋난다”며 꿋꿋이 버텨왔고, 대통령이 전화로 윽박질러도 맞받아치기까지 했던 그다. 그런데 ‘악법 중의 악법’이라는 소위 ‘테러방지법’을 난데없는 비상사태라는 이유로 직권상정 해버려 야당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필리버스터 저항에도 아랑곳 없이 결국은 여당단독으로 통과되게 만들었다. 온화한 의사출신 정치인에, 호남과의 동서화해에도 누구보다 앞장섰던 부산출신 국회의장이 하루 아침에 끝이 안좋아 나쁜 정치인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가 임기말에 왜 그런 수모를 자초했는지 여전히 의문이고, 언젠가는 국정원장을 만난 직후 비상사태 운운하며 돌연 직권상정의 과오를 저지른 내막을 밝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썽을 직권 상정한’ 국회의장이었다는 오명이 평생 붙어다닐 것은 분명하니 그의 호평이 원상을 회복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무리를 반복하고, 고집과 불통과 독선으로 나라와 국민을 힘들게 하고 있는 국정지도자의 끝은 어떤 평가로 결말이 날까.
빈곤퇴치와 사랑의 집짓기 등으로 존경받는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암이 완치됐다는 것을 미국인들이 기뻐하는 소식을 접하며, 임기 2년도 남겨놓지 않은 우리네 대통령은 나중 좋은 소리를 들으며 평온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지, 갈수록 나쁜 쪽으로만 질주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의 시름도 깊어만 가니 참 걱정이다.
< 김종천 편집인 >
'●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00자 칼럼] 코레아노와 에니켕 (0) | 2016.03.18 |
---|---|
[한마당] 권력공천과 일그러진 대의정치 (0) | 2016.03.18 |
[칼럼] 총선의 시대정신 (0) | 2016.03.18 |
[칼럼] ‘테러방지법’에 한계는 없다 (0) | 2016.03.12 |
[1500자 칼럼] 안개 자욱한 허클리 벨리에서 (0) | 2016.02.27 |
[한마당] 여전히, 친일파의 나라 (0) | 2016.02.27 |
[칼럼] 서부전선의 퇴각 (0) | 2016.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