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장편소설 쓸 때마다 질문들 견디며 그 안에 산다“

 

 
 
7일(현지시각)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가 스웨덴 한림원에서 ‘빛과 실’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스톡홀름/로이터 연합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수백여명의 청중이 한강 작가만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1979년 4월 여덞 살 적 지은 시를 고요히 읽어 내려갔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7일(현지시각) 열린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한강 작가의 연설 제목은 ‘빛과 실’로, 그의 한국말은 나긋하지만 한 공간을 가득 매웠다. 유년기 광주에 살았던 그는 곧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될 것이란 걸 알게 된 뒤 공책과 문제집, 일기장에 끄적였던 시들을 모아 ‘시집’을 만들었다. 한강 작가는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고 했다. 뛰는 가슴 속 내 심장.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金)실- 빛을 내는 실.

노벨상 수상자들은 매해 12월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노벨 주간(Nobel Week·5∼12일)에 참석해 자신의 성취물이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연설을 한다. 한강 작가도 지난 10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공개한 자리이기도 한 한림원 그랜드홀을 찾아 대중을 만났다. 그는 1993년 작가 생활을 시작한 뒤 31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집필한 장편소설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며 만난 질문은 무엇이었는지를 이야기했다.

7일(현지시각)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이 열린 스웨덴 한림원에 비치된 한강 작가의 작품들. 사진 볼리비아 저널리스트 하비에르 클루어(Javier Clure) 제공

소설가의 일, “질문들을 견디며 사는 일”

한강 작가는 장편소설을 쓰는 일을 “질문들을 견디며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장편소설의 매력을 이렇게 말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1년, 길게는 7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7일(현지시각)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가 스웨덴 한림원에서 ‘빛과 실’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스톡홀름/로이터 연합뉴스

질문과 함께 사는 소설가는 글쓰기를 시작한 시점과 끝마친 시점에 있어 같은 사람일 수 없다. “변형된 상태에서 다시 출발”하며 새로운 소설로 나아간다. 한강 작가는 장편 ‘채식주의자’와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을 내놓기까지 품어 온 질문을 이 자리에서 나눴다.

특히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끊고자 한 주인공 영혜와 언니 인혜, 그 주변 인물들을 다룬 책 ‘채식주의자(2007년 출간)’ 앞에서 한강 작가는 이렇게 질문한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한강 작가는 이 책을 통해 2016년 한국인 최초로 영국 맨부커상 국제 부문 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인지도를 지닌 작가로도 발돋움했다.

한강 작가가 7일(현지시각)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을 했다. 지난 10월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했던 마츠 말름 상무이사(왼쪽)와 한강 작가(오른쪽). 스톡홀름/AP 연합뉴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이렇게 아름다운가”

한강 작가는 특히 광주 항쟁을 다룬 책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을 다룬 책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며 품어 온 질문을 소개하는 데 연설의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2012년 ‘희랍어 시간’을 발표하기까지 그는 주로 개인을 향한 폭력과 그 내면을 파고들며 인간다운 삶과 생명의 의미를 물었다. 희랍어 시간을 쓴 뒤엔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도 애썼다.

하지만 결국 그럴 수 없었다고 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서가에서 우연히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발견했을 때 껴안은 질문을 다시 마주한 것이다. 이 사진집엔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에 저항하다가 잔혹하게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이 담긴 사진과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병원 앞에 끝없이 줄을 선 사람들의 사진이 함께 놓였다. 인간의 상반된 모습이 담긴 이 사진들을 본 한강 작가가 품은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2021년 출간한 ‘작별하지 않는다’를 쓸 때도 비슷한 질문을 곁에 뒀다. 1948년 제주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정심’은 오빠의 유골을 찾기 위해 분투하고, 수십년이 지나도록 애도를 종결하지 않으며 끝끝내 망각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한강 작가는 이 책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을 글쓰기의 동력으로 삼았다.

7일(현지시각)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 청중들이 집중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스톡홀름/AFP 연합뉴스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던, 한강의 소설

이렇게 절실한 질문의 끝에서 한강 작가가 되돌아온 곳은 45년 전의 어렸던 그가 “사랑이란 어디에 있는지, 사랑은 무엇인지” 묻고 답한 시였다. 어린 한강은 사랑이 “나의 심장”이란 개인적 장소에 위치하고, 사랑은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라고 답했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출간한 뒤, 소설을 읽고 고통을 느낀 독자들을 보며 이들의 고통이 자신이 소설을 쓰며 느낀 고통과 “연결”돼 있었다고 했다. 이 고통의 이유를 두고 그는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라며 처음으로 사랑을 생각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정심’을 들여다보면서는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 물음의 끝에서 결국 한강 작가는 자신의 모든 소설이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움이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질문의 모양을 한 대답을 내놓았다. 

7일(현지시각)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리는 한강 작가의 연설을 듣기 위해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 사진 장예지 특파원 penj@hani.co.kr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쓰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

한강 작가의 다음 소설은 어떤 사랑에 관한 질문을 던질까. 2021년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 이후 그는 새 소설을 쓰고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 책을 완성한 뒤 다음에 쓸 소설은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내 삶을 잠시 빌려주려 했던, 무엇으로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소설 ‘흰’과 형식적으로 연결되는 소설”일 것이라는 힌트를 남겼다.

그는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완성의 시점들을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이다. 지금까지 쓴 책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어느 사이 모퉁이를 돌아 더이상 과거의 책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한강 “장편소설 쓸 때마다 질문들 견디며 그 안에 산다“

노벨상 강연문 전문

 

 
 
7일(현지시각)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가 스웨덴 한림원에서 ‘빛과 실’이란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스톡홀름/로이터 연합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7일(현지시각) 스웨덴 한림원에서 ‘빛과 실’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1979년 4월 여덟 살 때 지은 시를 읽어내려가면서 시작한 강연에 수백명 청중은 귀를 기울였다. 6개 노벨상 중 문학상 수상자만 한림원에서 연설을 한다. 한강 작가의 연설은 이미 한 달여 전부터 표가 매진됐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다음은 한강 작가 강연문 전문.

빛과 실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제목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선 두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올라가는 여섯 단의 계단 모양 선 하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일곱 단의 계단 같은 선 하나. 그건 일종의 표지화였을까? 아니면 그저 낙서였을 뿐일까? 책자의 뒤쪽 표지에는 1979라는 연도와 내 이름이, 내지에는 모두 여덟 편의 시들이 표지 제목과 같은 연필 필적으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페이지의 하단마다에는 각기 다른 날짜들이 시간순으로 기입되어 있었다. 여덟 살 아이답게 천진하고 서툰 문장들 사이에서, 4월의 날짜가 적힌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의 두 행짜리 연들로 시작되는 시였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사십여 년의 시간을 단박에 건너, 그 책자를 만들던 오후의 기억이 떠오른 건 그 순간이었다. 볼펜 깍지를 끼운 몽당연필과 지우개 가루, 아버지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커다란 철제 스테이플러. 곧 서울로 이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그동안 자투리 종이들과 공책들과 문제집의 여백, 일기장 여기저기에 끄적여놓았던 시들을 추려 모아두고 싶었던 마음도 이어 생각났다. 그 ‘시집’을 다 만들고 나자 어째서인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졌던 마음도.

일기장들과 그 책자를 원래대로 구두 상자 안에 포개어 넣고 뚜껑을 덮기 전, 이 시가 적힌 면을 휴대폰으로 찍어두었다.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뛰는 가슴 속 내 심장.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金)실- 빛을 내는 실.

*

그후 14년이 흘러 처음으로 시를, 그 이듬해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나는 ‘쓰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5년이 더 흐른 뒤에는 약 3년에 걸쳐 완성한 첫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시를 쓰는 일도, 단편소설을 쓰는 일도 좋아했지만-지금도 좋아한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에는 특별한 매혹이 있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1년, 길게는 7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 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나는 그 상태에서 다시 출발한다. 다음의 질문들이 사슬처럼, 또는 도미노처럼 포개어지고 이어지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게 된다.

세번째 장편소설인 <채식주의자>를 쓰던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나는 그렇게 몇 개의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거부하고, 종내에는 스스로 식물이 되었다고 믿으며 물 외의 어떤 것도 먹으려 하지 않는 여주인공 영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안에 있다. 사실상 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혜와 인혜 자매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악몽과 부서짐의 순간들을 통과해 마침내 함께 있다. 이 소설의 세계 속에서 영혜가 끝까지 살아 있기를 바랐으므로 마지막 장면은 앰뷸런스 안이다. 타오르는 초록의 불꽃 같은 나무들 사이로 구급차는 달리고, 깨어 있는 언니는 뚫어지게 창밖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이 소설 전체가 그렇게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응시하고 저항하며. 대답을 기다리며.

그 다음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질문들에서 더 나아간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정체와 이탤릭체의 문장들이 충돌하며 흔들리는 미스터리 형식의 이 소설에서, 오랫동안 죽음의 그림자와 싸워왔던 여주인공은 친구의 돌연한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과 폭력으로부터 온힘을 다해 배로 기어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쓰며 나는 질문하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섯번째 장편소설인 <희랍어 시간>은 그 질문에서 다시 더 나아간다.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말을 잃은 여자와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각자의 침묵과 어둠 속에서 고독하게 나아가다가 서로를 발견한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촉각적 순간들에 집중하고 싶었다. 침묵과 어둠 속에서, 손톱을 바싹 깎은 여자의 손이 남자의 손바닥에 몇 개의 단어를 쓰는 장면을 향해 이 소설은 느린 속력으로 전진한다. 영원처럼 부풀어오르는 순간의 빛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연한 부분을 보여준다. 이 소설을 쓰며 나는 묻고 싶었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그 질문의 끝에서 나는 다음의 소설을 상상했다. <희랍어 시간>을 출간한 후 찾아온 2012년의 봄이었다.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침내 삶을, 세계를 끌어안는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 제목을 짓고 앞의 20페이지 정도까지 쓰다 멈춘 것은, 그 소설을 쓸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그 시점까지 나는 광주에 대해 쓰겠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1980년 1월 가족과 함께 광주를 떠난 뒤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이후 몇 해가 흘러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우연히 발견해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열두 살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저항하다 곤봉과 총검, 총격에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 있는, 당시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된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책이었다. 어렸던 나는 그 사진들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러니까 2012년 봄,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어느 날, 한번도 풀린 적 없는 그 의문들을 내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오래 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후 1년 가까이 새로 쓸 소설에 대한 스케치를 하며, 1980년 5월 광주가 하나의 겹으로 들어가는 소설을 상상했다. 그러다 망월동 묘지에 찾아간 것은 같은 해 12월, 눈이 몹시 내리고 난 다음날 오후였다. 어두워질 무렵 심장에 손을 얹고 얼어붙은 묘지를 걸어나오면서 생각했다. 광주가 하나의 겹이 되는 소설이 아니라, 정면으로 광주를 다루는 소설을 쓰겠다고. 9백여 명의 증언을 모은 책을 구해, 약 한 달에 걸쳐 매일 아홉 시간씩 읽어 완독했다. 이후 광주뿐 아니라 국가폭력의 다른 사례들을 다룬 자료들을, 장소와 시간대를 넓혀 인간들이 전 세계에 걸쳐, 긴 역사에 걸쳐 반복해온 학살들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그렇게 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 내가 떠올리곤 했던 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 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오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 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당연하게도 나는 그 망자들에게, 유족들과 생존자들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돌이킬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빌려드리는 것뿐이었다. 소설의 처음과 끝에 촛불을 밝히고 싶었기에, 당시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곳이었던 상무관에서 첫 장면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열다섯 살의 소년 동호가 시신들 위로 흰 천을 덮고 촛불을 밝힌다. 파르스름한 심장 같은 불꽃의 중심을 응시한다.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

그렇게 <소년이 온다>를 완성해 마침내 출간한 2014년 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다고 고백해온 고통이었다. 내가 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고통과,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느꼈다고 말하는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같은 해 유월에 꿈을 꾸었다. 성근 눈이 내리는 벌판을 걷는 꿈이었다. 벌판 가득 수천 수만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고, 하나하나의 나무 뒤쪽마다 무덤의 봉분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 아래에 물이 밟혀 뒤를 돌아보자,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에서부터 바다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왜 이런 곳에다 이 무덤들을 썼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래쪽 무덤들의 뼈들은 모두 쓸려가버린 것 아닐까. 위쪽 무덤들의 뼈들이라도 옮겨야 하는 것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지금.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나에게는 삽도 없는데. 벌써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는데. 꿈에서 깨어나 아직 어두운 창문을 보면서, 이 꿈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꿈을 기록한 뒤에는 이것이 다음 소설의 시작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어떤 소설일지 아직 알지 못한 채 그 꿈에서 뻗어나갈 법한 몇 개의 이야기를 앞머리만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2017년 12월부터 2년여 동안 제주도에 월세방을 얻어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바람과 빛과 눈비가 매순간 강렬한 제주의 날씨를 느끼며 숲과 바닷가와 마을길을 걷는 동안 소설의 윤곽이 차츰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들을 읽고 자료를 공부하며,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잔혹한 세부들을 응시하며 최대한 절제하여 써간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것은, 검은 나무들과 밀려오는 바다의 꿈을 꾼 아침으로부터 약 7년이 지났을 때였다.

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했던 몇 권의 공책들에 나는 이런 메모를 했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바람과 해류. 전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이 소설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의 여정이 화자인 경하가 서울에서부터 제주 중산간에 있는 인선의 집까지 한 마리 새를 구하기 위해 폭설을 뚫고 가는 횡의 길이라면, 2부는 그녀와 인선이 함께 인간의 밤 아래로-1948년 겨울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의 시간으로-, 심해 아래로 내려가는 수직의 길이다. 마지막 3부에서 두 사람이 그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밝힌다.

친구인 경하와 인선이 촛불을 넘겼다가 다시 건네받듯 함께 끌고 가는 소설이지만,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진짜 주인공은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사람. 애도를 종결하지 않는 사람.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 평생에 걸쳐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와 온도로 끓고 있던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묻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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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 3년이 흐른 지금, 아직 나는 다음의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 책을 완성한 다음에 쓸 다른 소설도 오래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내 삶을 잠시 빌려주려 했던, 무엇으로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흰>과 형식적으로 연결되는 소설이다. 완성의 시점들을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이다. 지금까지 쓴 책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어느 사이 모퉁이를 돌아 더이상 과거의 책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내가 그렇게 멀리 가는 동안, 비록 내가 썼으나 독자적인 생명을 지니게 된 나의 책들도 자신들의 운명에 따라 여행을 할 것이다. 차창 밖으로 초록의 불꽃들이 타오르는 앰뷸런스 안에서 영원히 함께 있게 된 두 자매도. 어둠과 침묵 속에서 남자의 손바닥에 글씨를 쓰고 있는, 곧 언어를 되찾게 될 여자의 손가락도.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내 언니와, 끝까지 그 아기에게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말했던 내 젊은 어머니도. 내 감은 눈꺼풀들 속에 진한 오렌지빛으로 고이던,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으로 나를 에워싸던 그 혼들은 얼마나 멀리 가게 될까? 학살이 벌어진 모든 장소에서, 압도적인 폭력이 쓸고 지나간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밝혀지는, 작별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사람들의 촛불은 어디까지 여행하게 될까? 심지에서 심지로, 심장에서 심장으로 이어지는 금(金)실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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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낡은 구두 상자에서 찾아낸 중철 제본에서, 1979년 4월의 나는 두 개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사랑은 무얼까?

한편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나는 줄곧 다음의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내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첫 장편소설부터 최근의 장편소설까지 내 질문들의 국면은 계속해서 변하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이 질문들만은 변하지 않은 일관된 것이었다고. 그러나 이삼 년 전부터 그 생각을 의심하게 되었다. 정말 나는 2014년 봄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난 뒤에야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우리를 연결하는 고통에 대해- 질문했던 것일까?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은 ‘나의 심장’이라는 개인적인 장소에 위치한다고 1979년 4월의 아이는 썼다.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그 사랑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한강 “맨손으로 무장 군인 껴안으며 막는 모습…용기 느껴”

스톡홀름 노벨상 수상 기념 회견서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6일(현지시각)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상박물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한강 작가가 6일(현지시각)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수상 기념 기자회견에서 “ 2024년에 다시 계엄 상황이 전개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축제와 같은 12월을 보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컸지만 지난 3일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윤석열 대통령 탄핵 국면에 들어선 현재, 한강 작가는 가장 먼저 계엄의 밤을 말했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를 ”

한강 작가는 이날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앞서 사회자가 한국의 정치 혼란을 언급하며 “이번주가 어떠셨냐”고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 소년이 온다 ’를 쓰기 위해 1979년 말부터 진행된 계엄 상황에 대해 공부를 했었”다며 “ 모든 사람이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이 1980년 5월과 이번 겨울의 차이라고 짚었다.

그는 “맨몸으로 장갑차 앞에서 멈추려고 애를 쓰는” 모습, “맨손으로 무장한 군인들을 껴안으면서 제지하려는 모습”, “총 들고 다가오는 군인들 앞에서 버텨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 “마지막에 군인들이 물러갈 때는 잘 가라고 마치 아들들한테 하듯이 소리치는 모습”을 언급하며 “진심과 용기가 느껴졌던 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 3일 밤 국회에 투입됐던 “젊은 경찰”과 “젊은 군인”들이 “내적 충돌을 느끼면서 최대한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도 했다. 이어 “ 보편적인 가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각하고 판단하고 고통을 느끼면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던 적극적인 행위였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강 작가는 “ 바라건대 무력이나 강압으로 언로를 막는 방식으로 통제를 하는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답변을 마무리했다.

지난 10월10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 언론 접촉이나 행사 참석을 최소화했던 한강 작가가 처음으로 전세계 독자와 대중을 향한 메시지를 낸 것이다.

세계 언론은 ‘민주주의 모범국’ 한국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12·3 내란사태를 연일 주요하게 보도하며 이날 회견에서 한강 작가가 어떤 발언을 내놓을지 촉각을 세웠다. 특히 그가 2014년 작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계엄령이 내려진 1980년 광주의 상흔을 세심하게 다뤘기 때문이다. 이날 한 스위스 언론도 과거 박근혜 정부 시절 한강 작가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사실을 언급하며 표현의 자유 훼손에 대한 우려가 되지 않는지 물었다. 한 작가는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하기 쉽지 않지만, 언어는 눌러 막으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속성이 있다. 어떤 일이 있다 해도 계속 말해지는 진실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채식주의자 ‘유해도서’ 낙인…“가슴 아프다” 

한강 작가는 소설 ‘채식주의자’를 둘러싼 국내의 오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최근 보수 성향 학부모 단체는 이 소설이 “청소년 유해 매체물”이라며 초·중·고교 도서관 비치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소설은 극단적으로 육식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려는 주인공 영혜를 남편과 언니, 형부의 시각에서 다룬다. 이에 대해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는 2019년 스페인에서 고등학생들이 주는 상을 받은 적이 있다. 학생들이 (책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며 한국과는 다른 스페인의 사례를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 책은 질문으로 가득한 소설”이라며 “(책은) 오해도 많이 받고 있는데, 그게 이 책의 운명이란 생각도 든다. 책을 쓴 사람으로선 이 소설에 유해도서라는 낙인을 찍고, 도서관에서 폐기를 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었던 게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한강 작가는 또한 채식주의자가 “어떤 사람이 완벽하게 폭력을 거부하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녀(주인공 영혜)를 둘러싼 세계는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가하는 점”이라며 “영혜는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전진한다. (그녀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이 세계의 폭력이 더 미쳐있는 것일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6일(현지시각) 스웨덴 스톡홀름의 노벨 박물관 레스토랑 의자에 서명한 뒤 들어보이고 있다. 의자에는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와 2023년 수상자인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의 서명 보인다. 스톡홀름/AP 연합
 

 

그래도, 다시 ‘희망’을 말한다

지금의 혼란과 실망에도, 기자회견 말미에서 한강 작가가 말한 건 ‘희망’이었다. 그는 “때로는 더 희망이 있나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희망이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 것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시대 문학의 의미를 되짚는 질문엔 “문학은 끊임없이 타인의 내면을 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을 깊게 파고들어가는 행위다. 이를 반복하며 내적인 힘이 생기게 된다”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최선을 다해 어떤 결정을 하기 위해 애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문학은 우리에게 여분의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한강 작가는 이날 일정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노벨 위크(Nobel week·5∼12일)’ 활동에 참여한다. 그는 “처음엔 제게 쏟아지는 개인적 관심에 부담스러웠지만, 이 상은 문학에 주는 상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며 “이제 다시 글을 쓸 준비가 되었다. 오늘 이후로 노벨 주간을 즐기려고 한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아파트에 가 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말괄량이 삐삐’를 펴낸 스웨덴의 대표 아동문학 작가다.

한강 작가는 7일 수상자 강연을 마치고, 10일 시상식에서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다.

 

한강이 기증한 ‘작은 찻잔’…“날 책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주문”

 

 
 
한강 작가가 6일(현지시각) 스톡홀름 노벨상 박물관에 기증한 소장품인 작은 찻잔. 연합
 

노벨문학상 수상을 위해 스웨덴 스톡홀름을 찾은 한강 작가는 6일(현지시각) 노벨상 박물관을 찾는 것으로 첫 일정을 시작했다. 한강 작가는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집필할 당시 썼던 ‘작은 찻잔’을 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는 “찻잔은 나를 책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주문과 같았다”고 말했다.

노벨상 수상자들을 축하하는 ‘노벨 위크(Nobel Week·5~12일)’ 이튿날인 이날, 수상자들은 노벨상 박물관에서 처음 만났다. 박물관이 준비한 수상자 소장품 기증 행사에 선 한강 작가는 옥색빛이 감도는 작은 찻잔을 기증했다. 수상자에게 의미가 있거나,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는 소장품을 박물관에 기증하는 건 노벨 주간 이뤄지는 오랜 전통이다. 박물관은 이 물건을 영구 전시하고, 관람객들에게 그 의미를 설명한다. 한강 작가는 이날 오후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찻잔은) 내게 굉장히 친밀한 사물이었다. 조용하게 한마디를 건네는 느낌이 좋아서 (기증한) 거였다”며 하루에 몇 번씩 책상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딱 그 잔만큼 홍차를 마셨다. 찻잔은 계속해서 저를 책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주문 같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6일(현지시각)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스톡홀름 노벨상 박물관에서 수상자만을 위한 특별한 방명록인 박물관 레스토랑 의자에 서명을 남긴 뒤 의자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강 작가가 찻잔을 기증하며 함께 보낸 자필 메모엔 이렇게 적혔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동안 몇 개의 루틴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1.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 가장 맑은 정신으로 전날까지 쓴 소설의 다음을 이어 쓰기.

2. 당시 살던 집 근처의 천변을 하루 한 번 이상 걷기.

3. 보통 녹차 잎을 우리는 찻주전자에 홍차잎을 넣어 우린 다음 책상으로 돌아갈 때마다 한 잔씩만 마시기.

그렇게 하루에 예닐곱 번, 이 작은 잔의 푸르스름한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이 당시 내 생활의 중심이었다.

한강 작가는 올해로써 작가로 활동한 지 31년이 됐다. 그는 “메모에 쓴 것처럼 그 루틴을 지키면서 살았다면 아주 큰 거짓말이고, 대부분은 방황하고 무슨 소설을 쓸지 고민하고 잘 안 풀려서 덮어놓고 걷고 그런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 그 찻잔을 사용할 땐 열심히 했다. 가장 열심히 했던 때의 제 사물을 기증했던 것이다” 라고 말했다. 차를 즐겨 마신다는 한강 작가는 지난 10월10일 노벨문학상 선정을 알리는 노벨위원회와의 첫 통화에서도 “차를 마시고 싶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아들과 차를 마시면서 오늘 밤 조용히 축하하고 싶다”며 소감을 전했다.

수상자들은 박물관 레스토랑에 놓이는 의자에 친필 서명을 하는 것으로 축제의 막을 열었다. 노벨상 제정 100주년인 2001년부터 이 전통이 만들어진 뒤 수상자들은 해마다 특별한 방명록에 이름을 남긴다. 검정빛 정장을 차려입은 한강 작가도 의자 바닥면에 서명한 뒤 환한 미소를 띄웠다.

한강 작가가 6일(현지시각)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박물관에 기증한 찻잔과 함께 남긴 메모. 연합

< 한겨레 스톡홀름 장예지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