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 행사 하루 앞 합의, SK, LG에 2조원 상당 배상액
배터리 특허권 침해 분쟁으로 소송중인 엘지화학과 에스케이이노베이션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시한 하루를 앞두고 수년째 이어온 엘지(LG)와 에스케이(SK) 두 회사의 배터리 분쟁이 극적 합의에 성공했다. 미 현지에선 ‘바이든의 승리’란 평가가 나온다.
엘지에너지솔루션과 에스케이이노베이션 두 회사 관계자는 11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지난 주말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사건과 관련해 합의를 이뤘다. 오늘(11일) 중 각각 이사회를 열어 최종 공동 합의문을 발표한다”고 밝혔다. 합의문에는 에스케이 쪽이 무는 보상금의 규모와 내용도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두 회사가 합의키로 한 사건은 에스케이이노베이션이 엘지에너지솔루션의 영업비밀을 침해했다며 엘지 쪽이 에스케이 쪽을 미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소한 사건이다. 미 국제무역위는 지난 2월 엘지 쪽 손을 들어주며 에스케이 쪽에 10년 수입 금지 조처 등의 최종 판결을 내렸다. 해당 판결은 11일 오후 1시(한국시각 기준)이 시한인 조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여부를 앞두고 있었다.
두 회사의 타결에 대해 미 워싱턴포스트는 “이번 합의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승리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번 분쟁이 조 바이든 행정부가 강조하는 미국 내 일자리 창출과 지식재산권 보호라는 가치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합의에 따라 에스케이 쪽의 조지아주 투자 계획은 유지되고 동시에 엘지 쪽의 지식재산권 침해에 따른 막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두 회사의 합의 소식이 외신을 통해 전달된 배경도 이와 맞닿아 있다. 두 회사 합의 과정에 밝은 한 인사는 “미 무역대표부(USTR) 쪽에서 미 현지 언론에 합의 사실을 구두로 이야기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배터리 분쟁이란? : 배터리 후발주자인 에스케이이노베이션이 과거 엘지화학(엘지에너지솔루션이 분사하기 전 업체)의 기술진을 영입하면서 영업비밀을 침해한 사건이다. 엘지화학은 지난 2019년 4월 영업비밀 침해를 이유로 들어 미 국제무역위원회(ITC)에 SK이노베이션을 제소했다. 미 국제무역위는 지난해 2월 조사 과정에서 에스케이이노베이션이 핵심 자료를 부당하게 파기했다는 이유 등을 앞세워 엘지화학 손을 들어주는 예비판결을 내린 데 이어 지난 2월 최종 확정판결했다.
LG-SK, 배터리 분쟁 극적 타결 막전막후
미 정부 중재 겸한 압력…글로벌 배터리 대전 본격화
성장 잠재력이 큰 배터리 기술을 둘러싼 국내 대표 그룹인 에스케이(SK)와 엘지(LG) 간의 전투가 마침내 끝났다. 지난 2019년 4월 엘지가 에스케이를 미 국제무역위원회(ITC)에 분쟁 제기한 지 2년 만이다. 미 정부의 적극 중재와 압력 속에 2조원에 이르는 보상금을 받는 것을 전제로 에스케이와의 합의문에 엘지가 서명했다. 이로써 배터리 사업 전체를 잃을 뻔한 에스케이는 재도약의 발판은 마련했다. 두 회사는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완성차와 배터리 업계를 넘나드는 ‘글로벌 배터리 대전’에 나설 태세다.
엘지-에스케이 극적 타결
두 회사의 분쟁 합의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시한(11일 오후 1시, 한국시각 기준)을 하루 앞두고 나왔다. 두 회사가 이날 함께 발표한 보도자료를 보면, 엘지에너지솔루션은 에스케이이노베이션으로부터 2조원(현재가치 기준) 상당의 배상금을 받는다. 2조원 중 1조원은 현금으로 나머지 1조원은 배터리 기술과 관련한 기술사용료(로열티)다. 다만 사용료 지급 기일 등에 대해선 ‘합의된 방법’이라고만 두 회사가 밝혔다. 동시에 두 회사는 이번 합의를 계기로 미 국제무역위에 계류 중인 특허권 침해 관련 소송 등 각종 쟁송 절차를 멈추기로 했다. 한발 나아가 향후 10년간 추가 쟁송 금지 약속도 했다.
두 회사는 모두 ‘우호적 협력’을 강조했다. 김종현 엘지에너지솔루션 사장과 김준 에스케이이노베이션 사장은 “한미 양국 전기차 배터리 산업의 발전을 위해 건전한 경쟁과 우호적인 협력을 하기로 했다”며 “특히 미국 바이든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배터리 공급망 강화 및 이를 통한 친환경 정책에 공동으로 노력한다”고 밝혔다. 두 사장은 “합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한국과 미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합의는 두 회사의 공식 발표 전에 미 언론을 통해 처음 전해졌다. 두 회사 합의 과정에 밝은 한 고위 인사는 “바이든 행정부의 거부권 행사 시한을 앞두고 미 무역대표부(USTR) 중심으로 강한 중재가 있었다”고 말했다. 두 회사의 합의를 처음 보도한 미 <워싱턴포스트>는 “(거부권 시효가 임박한 시점에 이뤄진 이번 합의는) 바이든의 승리(Victory for President Biden)”라고 보도했다. 친환경 사업과 일자리 창출에다 지식재산권 보호라는 두마리 토끼를 바이든이 잡았다는 뜻이다.
주전장은 미국…“바이든 마음을 훔쳐라”
두 기업의 사활을 건 배터리 전투의 주전장은 ‘미국’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 두 회사가 지출한 대미국 전방위 로비 내역이다. 미국 비영리 시민단체 ‘정치반응센터’(CRP)가 운영하는 ‘오픈시크릿츠’(www.opensecrets.org) 자료를 보면, 두 회사가 지난해 한 해에만 미국 상·하원과 미 백악관과 상무부 등 정부에 쓴 로비자금은 모두 13억원이 넘는다. 미 국제무역위 판결이 임박한 지난해 4분기(10~12월)에 자금 투입이 집중됐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 있던 에스케이 쪽은 미 국제무역위 위원장을 장수(2005~2014년)한 샤라 애러노프씨를 고용한 로비 회사에 일감을 맡겨 눈길을 끌기도 했다.
김준 에스케이이노베이션 대표(사장)는 지난 3월 말 미국으로 건너가 현장에서 배터리 분쟁을 진두지휘했다. 엘지와의 최종 합의 시점에도 미국에 체류 중이었다. 지난 한 달 남짓 동안 ‘배터리 합의’에 김 대표가 모든 현안을 젖혀두고 올인(All-in)한 셈이다. 특히 이 회사의 김종훈 이사회 의장(사외이사)도 지난 3월 김 대표와 함께 출국해 주목을 받았다. 김 의장은 참여정부 때 통상교섭본부장(장관급)을 지내며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한국 쪽 협상 대표였다. 미 국제무역위는 물론 미 상무부와 무역대표부(USTR)에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김 의장의 출국이 관심을 끈 이유다. 김 의장은 2017년에 에스케이이노베이션에 영입됐다.
최근 2~3개월간 두 회사의 로비전은 ‘바이든 마음 얻기’로 요약할 수 있다. 지난 1월 임기를 시작한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 노선이 두 회사의 배터리 분쟁과 미묘하게 맞닿아 있어서다. 바이든 행정부는 전기차를 포함한 친환경 사업과 일자리 창출에 정책 우선순위를 높게 두고 있다. 특히 배터리-완성차로 이어지는 전기차 밸류 체인(Value-Chain)을 미국 내에 형성하는 걸 원해왔다. 미 조지아주에 공장 증설을 위해 대규모 투자에 나선 에스케이로선 반색할만한 포인트다. 에스케이가 오바마 정부 당시 법무부 차관을 지냈으며 조지아주 태생의 샐리 예이츠 변호사를 소송단에 영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동시에 바이든 행정부는 지식재산권(IP) 훔치기에 강경 기조를 갖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기술 추격과 이 과정에서 벌어진 기술 탈취에 경계심이 높기 때문이다. 미 국제무역위가 판결한 영업비밀 침해에 대해 조 바이든 대통령이 거부(Veto)권을 행사하기 쉽지 않은 처지였단 얘기다. ‘바이든 딜레마’로 불린 까닭이다. 엘지 쪽이 지난달 에스케이의 조지아공장 증설을 받아 안을 수 있는 대규모 미국 현지 투자 계획을 내놓은 것은 바이든 행정부의 이런 딜레마를 의식해 내놓은 공세였다.
한 층 복잡해진 글로벌 배터리 대전
두 회사가 2년 남짓 전투를 벌인 배경엔 최근 3~4년 만에 천지개벽에 가까운 변화를 보이는 글로벌 배터리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이번 분쟁이 어떤 결말로 이어지냐에 따라 세계 배터리시장의 주도권 쟁탈전 양상도 달라질 수 있었다. 한국 언론뿐만 아니라 영·미권과 유럽권 매체들도 앞다퉈 두 회사의 분쟁을 다룬 뉴스를 내보낸 까닭이다.
배터리는 내연기관 자동차의 뒤를 이으며 급성장 중인 전기차에 반드시 필요한 부품이다. 기술 양식도 표준화되지 않은 단계라 기술 발전 여지가 크고 그에 따라 변화 양상이 다층적이다. 현재는 리튬-이온 배터리가 주류 기술이지만 전문가들은 멀지 않은 시기에 전고체 배터리가 등장하며 판도가 흔들릴 수 있다고 예견한다. 특히 최근 들어 배터리를 전문업체에 의존해오던 완성차 회사들이 배터리 기술 내재화에 관심을 쏟는 행보도 시장의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한 예로 세계 전기차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미국의 테슬라뿐만 아니라 독일의 폴크스바겐(VW)은 지난달 15일 ‘파워 데이’를 열어, “배터리를 핵심 사업으로 삼겠다”며 2030년까지 유럽에서 총 240GWh 규모의 배터리 셀 생산 설비를 자체적으로 갖춘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이번 합의로 두 회사가 얻은 이해득실은 뚜렷하다. 에스케이이노베이션은 ‘사업 정리’ 위기에서 벗어나 재도약을 꿈꿀 수 있게 됐다. 연내 완공키로 한 미 조지아주 공장 건설도 진행된다. 엘지에너지솔루션은 ‘기술 우위’를 확인시키며 2조원 상당의 배상금을 챙겼다. 덕택에 투자 재원을 넉넉히 확보한 측면이 있다. 이 회사는 2016~2020년 기간 동안 중국과 폴란드 공장 증설에 쏟아부은 돈만 7조원에 이른다. 2022년까지 두 지역에 잡혀 있는 잔여 투자액만 1조6천억원이다. 현대차의 코나 화재 관련 물어야할 배상금 재원도 이번에 확보한 측면이 있다.
엘지 쪽은 “이번 합의를 계기로 본격 개화기에 들어간 배터리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며 선의의 경쟁자이자 동반자적 협력관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에스케이 쪽도 “미국 사업 운영과 확대에 불확실성이 제거됐다. 미국은 물론 글로벌 전기차 산업 발전과 생태계 조성을 위해 추가 투자도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경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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