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한마당]
따지고 보면 100년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를 집어삼킨 뒤 36년 동안 조선 사람들을 왜식으로 마음껏 요리하며 부려 먹었다. 그런데 해방된 나라에서도 그들에게 비위 맞추고 앞잡이가 되었던 모리배들이 변신하고 득세하여 70여년 간을 백성들 위에 군림하면서 ‘왜풍'으로 호의호식하고 있다.
오로지 권좌에 눈이 멀어 약삭빠른 배신자들을 끌어안아 숨통을 열어준 게 이승만이다. 역사적 단죄의 기회였던 ‘반민특위’를 일제의 부역자들 손으로 박살낸 것은 치명적인 민족범죄에 다름아니다. 단 한마디 회개나 사죄도 없는 교활한 자들에게 칼과 총을 쥐어주어 날뛰게 만들었고, 오히려 고난을 견딘 선량한 백성들에게 이념과 사상의 용수를 씌워 멸문지화를 불렀으니, 역사를 되돌리고 천심(天心)을 짓밟은 죄과를 어찌 지우겠는가.
이승만이 일제 잔재의 불씨를 되살린 바탕 위에서 4.19 혁명의 분노도 잠시, 아예 일제 빼닮은 정치로 친일의 뿌리를 넓고 깊게 만들어준 인물이 박정희다. 그는 일본 천황에게 피로 충성을 맹세한 황군의 혈맥과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식민시절 득세했던 자들과 기업, 그 후예를 중용하여 ‘만년 기득권층’의 신분세탁과 권세영화를 궤도에 올려주었다.
일제 잔재의 생명력을 길러주는 데 혁혁하게 기여하고 있는 친일 족벌 언론들 또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저들의 교묘하고 음습한 왜색 논조가 친일 후예들에게 든든한 우군이 되고, 독버섯을 번지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 ‘카르텔’까지 이루게 된 것은 부인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독립투사들은 멸시당하고 설자리가 없어 북으로 피신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들을 악랄하게 색출하고 고문했던 고등계 형사, 독립군을 토벌했던 일제군관들이 떵떵거리며 살다가 지금도 국립묘지에 버젓이 누워 현충의 선열들로 참배를 받고 있다. 그들의 묏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친일부역자 파묘법 제정에 기를 쓰고 반대하는 인물과 카르텔이야말로 본색이 친일이요 왜색종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 있겠는가.
그런 카르텔의 영향력을 믿는 자들과 친일의 피를 속이지 못하는 이들, 또한 일본우익의 ‘장학금’으로 학문적 ‘계급장’을 단 자들은 철면피한 반민족적 언동을 멈추지 않는다. 일본극우들이 외쳐대는 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모독하고, 일본정부의 억지 변명을 대변하고 옹호하는데 기를 쓴다.
그들의 소리가 마침내 사법의 영역에서도 대놓고 터져 나왔다. 역사적인 강제징용 배상요구 소송을 각하 판결하면서 하는 소리 왈, “일본 포함 어느 나라도 식민지배 불법성을 인정한 나라가 없다”느니, “일본의 청구권자금이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고 일갈했고, “(배상을 위해 강제집행 했다가) 일본과의 관계나 미합중국과의 관계가 훼손될 수 있고 문명국 위신이 추락할 것”이라고 오지랖 넓게 걱정하는 우국충정을 설파했다.
마치 일본정부나 일본법원이 했을 법한 말을 대한민국의 서울 중앙지법 부장판사가 대법원 판례까지 어겨가며 판결문이라고 외쳐댄 희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일말의 양심이나 염려는 있었는지, ‘법정의 평온과 안정’을 이유로 선고일을 기습 변경해 소송당사자들도 참석하지 못했다니, ‘극우 판사의 친일쿠데타’라고나 할까.
친일세력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활개치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재판장을 일본으로 보내라”는 분노가 들끓고, “탄핵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폭발하는 것을 보면 결코 저들이 한국사회의 미래는 아닐 것이요, 시대와 세대가 흐르면 한민족의 정체성에 짓눌려 쇠락하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대다수 국민이 독도에 애착하고, 일제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며,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응원하면서 강제징용 배상을 외면하는 일본정부와 기업에 분노하는 민심을 보면 그렇다. 더구나 사죄는 커녕 적반하장의 치졸함에 정치 후진인 일본에 비해, 민주정치 선진에 부쩍 커진 한국의 국력과 활력의 자부심으로 믿음은 더 커지게 된다.
우리 이제 저들을 가여워하자. 오염과 중독을 벗어나려면 몇 배의 노력과 희석이 필요하니까. 허물은 쌓기 쉬워도 회개하고 용서받아 떳떳해지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세상은 약삭빠르며 사악한 자들이 설치게 되어있지 않나. 그렇지만 교활한 자들은 강자 앞에선 맥을 못추는 법이니.
일제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교육과 노예근성을 떨치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은 걸릴 것이다…” 그래, 식민 노예근성의 마지막 발악들 해보라고 하자. 이제 70여년 흘렀으니 20여년 만 참고 견디면 친일 독버섯들은 햇볕아래 곰팡이처럼 자연 소멸되고야 말 것이다. 이 독한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제 종말을 향해 가고있지 않는가.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210610 >
[한마당 칼럼] ‘한번 저지르면 그만’
"개혁은 ‘한번 저지르면 그만’인 범죄적 통념과 악행을 뿌리뽑는 일이다."
조선시대 ‘보쌈’이라는 일종의 납치풍습이 있었다. 약탈혼, 즉 강제결혼 방식의 하나였다. 흔히 장가 못간 노총각이 처녀를 보에 싸서 납치해 결혼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수절과부가 홀아비나 노총각을 보쌈해 과부처지를 면하곤 했다. 또 양반집에서 남편을 둘 이상 섬길 팔자라는 처녀 딸을 위해 총각을 은밀히 납치해다가 한번 동침시켜 ‘액땜’하고는 다른 남자에게 출가시키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의 보쌈 비슷한 ‘약탈혼’의 풍습은 다른 나라에도 많다. 정복자 칭기스칸도 어머니 호엘룬이 몽골판 보쌈을 당해 태어났다고 전한다. 지금도 이슬람 나라들과 아프리카 등에서 종종 그런 뉴스가 나온다.
‘보쌈’은 아무리 선의이든 절박한 사정이 있었든, 사람을 납치하는 것이므로 명백한 원시적 강력 범죄다. 그런데도 서슴없이 결행하고, 일부에서 ‘묵인’해 온 관행은, 어느 경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 번만 해치우면 그만’이라는 통념이 바탕에 깔려있다. 다시 말해 여자든 남자든 한 차례 범하면 어쩔 수 없이 자기 사람이 되고, 결국 인정받지 않느냐는, 강제적 체념과 이기적 범죄 합리화의 산물이다. 요즘 일부 젊은 층의 성범죄와 스토킹 등에서도 그런 의식의 흐름의 저류에 있다고 본다.
문제는 ‘한 번 해치우면 그만’이라는 인식과 행태가 비단 남녀 관계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게 옳든 그르든, 선이든 악이든 따지지 않고 무조건 저지르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마치 보쌈하듯 해치우고도 뭐가 어떠냐는 식의 범죄적 인식과 언행들, 하지만 사람들은 잠시 분노하다가도 은연 중 체념해버리는 ‘정의의 상실과 무감각화’ 현상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유린 한 뒤 궁궐터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동물원까지 만들어 버렸다. 정기어린 명산들의 정상에는 쇠말뚝을 박았다. “자, 이쯤 해놓으면 너희들이 대대손손 굴복하지 않고 어쩌겠느냐”는 악질 범죄자의 흑심이었다. 그들 노림수대로 체념할 뻔했지만, 총독부 건물을 과감히 헐고 경복궁 창경궁을 복원하여 민족 혼을 되살렸다. ‘한 번 저지르면 그만’인 통념에 철퇴를 가해 민족 정의를 바로 세운 사례다. 그런데 “한 번 저지르면~”의 범죄적 소산을 뿌리 뽑고 “~안된다!”는 정의를 되살린 일들이 얼마나 될까. 역사에서, 공동체에서, 개인의 일상과 인륜에서…
최근 ‘개혁’의 화두가 뜨겁다. 재벌개혁, 검찰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 등 여러 분야가 대상이다. 개혁은 불법 불합리와 부조리들이 켜켜이 쌓인 적폐를 혁파하고 쇄신한다는 의미가 있을 터이지만, 무엇보다 ‘저지르면 그만’인 범죄적 악행을 근절하고 징벌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돌아보면 ‘한번 저지르면 그만’인 속성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삶이 무너지고, 사회가 뒤틀리고, 민주주의와, 정의와 선이 어그러졌는가.
독재와 사욕의 정치인들이 죄없는 사람들을 짓밟고 패가망신 시킨 일들, 멀쩡한 기업을 공중분해 했고, 국토를 마구 파헤쳤으며, 역사를 거꾸로 돌렸던 일들까지. ‘나라를 통째로 보쌈한’ 범죄적 행태들. 그런데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발상이 검찰에서 나왔었다, “이미 저지른 걸 어쩌느냐”는 것이다.
검찰의 그런 망발은 그들의 통념이고 습성이었으니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한번 저지르면 그만’인 자의적 악행과 범죄들이 너무 많았다. 선량한 시민을 간첩으로 만들기도 했던…, 그들은 여전히 그 버릇을 팽개치지 못하고 혐의 조작과, 조직 이기의 선택적 수사에, ‘한 번 기소하면 무죄가 나와도 상관없는’ 기소 독점권을 휘둘러, 재판으로 3~4년을 고생하게 만든다. 검찰개혁은 그 못된 버릇을 고쳐주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 악습과 통념의 연장선에서 역시나 잠깐 감옥에 갔던 전두환과 그 일당은 지금껏 철면피한 언행을 일삼고 있다. 그런데 갓 재판이 끝난 이명박과 박근혜도 사면하자고 한다. 권력자가 ‘한번 저질렀으니 봐주자’는 개탄스런 통념의 무감각화다.
언론은 어떤가. 엄청난 비리처럼 떠들다가 사실이 아니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그걸 막자는 것이다. 처음 떠든 것처럼 아님이 밝혀졌으면 그 또한 크게 떠들고, 가짜와 거짓으로 피해를 입혔으면 합당하게 보상하라는 경고다.
최근의 선거에서 일부 후보자는 수많은 비리와 의혹이 나왔고 고발도 됐다. 하지만 이를 검증해야 할 언론은 극히 편파적으로 선택적 보도를 했다. 의혹을 선전하고 고발도 했던 정치권은 선거 가 끝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다. 선거판의 언론 못지않게 정치인들의 ‘한번 저지르면 그만’, ‘당선되면 그만’인 습관적 고질병이다. 유권자들도 의례 그러려니 한다. ‘저지르면 그만’이 바로 악행이며 범죄라는 인식과 징벌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마 다음 선거에도 그런 양상일 테니, 어느 세월에 선거가 참 민주의 축제로 승화될 것인가.
그렇다, 개혁은 뭐니 뭐니 해도 ‘한번 저지르면 그만’인 구석구석의 통념과 악행을 뿌리뽑는 일이다.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210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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