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마당]  노아의 방주와 바이러스 대홍수

 

 

성경은 역시 인류 최고의 책이다. 매일을 살아가며 얼핏 떠오르고 때로는 곰곰 음미해 볼 때마다 성경의 ‘적확무오(的確無誤)’함에 감복하곤 한다. 완전하고 흠없는 ‘정확(正確)무오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학적이거나 다른 여러 의미와 평가가 있겠지만, 나는 인간의 속성과 인간사에 대해 성경만큼 정확 정밀하게 분석 묘사하고 예견까지 한 책은 없다고 여겨져서 그렇다.

수천년 전의 기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현실감은 요즘의 팬데믹 상황에서 시간여행을 하듯 인류의 자화상에 대한 기시감을 던진다.

설령 목회자가 아니어도, 코로나19 재앙에 노아의 홍수를 떠올린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인류사에서 전 지구적 재난 가운데 첫 번째가 노아의 대홍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2월을 지나며 문득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가 다시 생각났다. 성경에는 2월17일 노아의 대홍수가 시작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하고 열흘만인 2월27일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홍수가 물러간 땅에 발을 다시 디딘 날이다.

 

1년을 넘어선 코로나 바이러스의 지구촌 창궐과 어쩌면 그렇게도 닮은 꼴 일까.

인간의 무절제한 자연파괴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괴물 바이러스의 출현을 낳았다. 코로나 공포에 쫓겨난 사람들은 속수무책 봉쇄되고 단절된 집안에 격리돼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인간이 머리를 짜내 겨우 백신을 만들었다지만, 코로나 괴물이 순순히 물러갈 것 같지도 않다. 세상은 바야흐로 코로나 전과 후로 구분될 큰 변혁기를 맞았다…그렇게 비슷한 지구 생태계 변전의 계기가 노아의 대홍수였다.

땅의 물이 솟고 하늘이 터진 듯 쏟아져 내린 비가 40일 밤낮을 퍼부어 지구의 높은 산꼭대기가 모두 물에 잠겼다. 세상의 숨 쉬는 것, 하늘과 땅의 살아있는 것들은 모조리 물에 쓸려 죽어갔다. 오로지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과 번식용 암수 동물들만이 살아남은 대재앙이 지구를 덮친 것이다.

 

세상이 타락하고 인간의 죄악이 만연하자 하나님은 탄식하며 징벌을 결심하고 경고한다. 하지만 방탕에 젖은 사람들 귀에 들릴 리가 없다. 의인인 노아만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 방주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방주는 배와는 전혀 달랐다. 모양도 기능도 크기도 상식과는 거리가 먼 기이한 방수 건조물이었다. 미국 켄터키주 윌리엄스 타운에 가면 노아의 방주를 재현한 거대한 모형이 세워져 있다. 방주는 사람들이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되고, 자력이 아닌 타력에 맡긴 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다. 돛이나 닻이 없었고, 스크류나 키도 없었다. 창문도 겨우 하나밖에 없는 이상한 배였다. 오로지 신의 섭리에 맡길 수밖에 없으니 동력장치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떠다니는 시체, 추악한 세상을 보아 유익할 일이 없으니 창문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무려 1백년 동안이나 그런 기이한 방주를 만드는 노아를 조롱했을 것이다. 노아는 오랜 세월 세상의 퇴폐와 질시를 참고 견디며 고독한 믿음의 수행을 계속한 것이다.

 

노아 일가는 그런 놀라운 믿음으로 천벌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자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엄청난 재앙과 축복을 직접 체험했던 아들 함은 아버지 노아의 하체를 보고 소문내는 인륜범죄로 저주를 당한다. 그리고 또 얼마가지 않아 언약을 저버린 후손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는 망상에 바벨탑을 쌓다가 언어도 거주지도 산산이 흩어지는 징벌을 받는다. 그 얼마 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이어진다.

성서의 사람들 발자취를 보면 어리석은 배반의 반복사를 보게 된다. 언약을 세우고 숱한 기적과 역사로 지키며 인도하는 데도 그들은 하나님 신뢰를 저버리고 거역하며 반역을 일삼는다. 그래서 결국 재앙의 반복을 겪는 고난과 업보의 삶을 살아간다.

사람들의 본질적인 죄성과 기억상실, 그리고 배반의 본능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너희가 최후에는 불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일찌감치 경고했던 것이다.

 

천하를 호령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신병기를 자랑하고, 우주를 정복한답시고 화성까지 로봇을 보내는 놀라운 재주를 가진 인간들이, 한낱 보이지도 않는 미물의 전염병 조화에 절절매면서도 여전히 겸손할 줄은 모른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멀기만 한 백신을 먼저 맞겠다며, 또한 서로 차지하려 꼼수와 억지를 쓰는 이기적 다툼과 탐욕, 나만은 괜찮다며 마스크도 봉쇄도 걷어치우라고 악을 쓰는 오기에 인간의 뿌리깊은 본성은 드러난다. 이 만인 고통의 시기에 아시안이 싫다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패악질, 동족을 학살하는 미얀마군의 무자비한 쿠데타 만행… 그저 살벌한 생존경쟁에 이기적인 투쟁을 벌이며 날고 기는 그 영리하고 약삭빠른 동물적 본능만이 영원하리니….

 

아무리 인간의 오만과 사악함의 죄과에 경종을 울려댄다 해도 습성은 바뀌지 않을 테고, 이내 망각하는 반복의 재앙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질 뿐이다.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