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제 / 논설위원
“윤석열이 처음 만난 사람이 왜 101살 철학교수였을까?”
“글쎄.”
“그것도 못 읽고 뭔 신문 글을 쓰냐.”
“음….”(분하다.)
“윤석열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뭘까?”
“뭔데?”(그냥 말하란 말이다!)
“철학이지 뭐겠어.”
씹던 냉면 몇 가닥을 내뿜을 뻔했다. 철학이 없어서 철학교수를 만났다니, 멋진 농담이군.
“웃을 일이 아니야. 대중적으로 상당히 어필하는 행보라고 나는 봐. 전문가들이 붙었다고 봐야지.”
대학 연구소에 적을 둔 친구 ‘고 박사’는 유명 정치 컨설턴트까지 거론하며 상상력의 나래를 폈다. 윤 전 검찰총장이 꽤 치밀하게 계산된 행보로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거다.(음, 내 주변에선 그래도 제일로 가방끈이 긴데, 신뢰해도 될까.)
윤 전 총장의 정치적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하는 언설들이 쏟아지고 있다. 4·7 재보궐선거 이후 중간지대와 보수진영을 아우르며 정치적 위상이 확고해질 것이다, 아니다, ‘검찰주의자’로서 철학의 빈곤과 정치 초짜의 한계를 드러내며 거품이 빠질 것이다, 말들이 분분하다. 정치공학적 분석을 더 얹고 싶진 않다. 그가 야기한 근본적인 가치와 원칙의 훼손에 대해 돌아보고 싶다.
‘윤석열 검찰’이 남긴 가장 큰 부정적 유산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에 전례 없는 거대한 균열을 낸 것이라고 본다. 윤 전 총장은 ‘살아있는 권력 수사’를 검찰이 추구하는 정의의 본질인 양 제시해왔다. 그러나 민주화된 국가에서 살아있는 권력은 정권만이 아니다. 의석을 분점한 야당, 자율성을 쥔 관료기관도 국가권력을 나눠 갖고 있다. 법적 권위를 부여받진 않았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 재벌 등도 빠트릴 수 없다. 오랜 집권을 통해 뿌리내린 검찰·수구매체·보수야당 ‘기득권 동맹’의 총체적 영향력이 정권보다 약하다 말하기도 어렵다. 이 모든 다원적 권력의 비리를 중립적으로 공정하게 수사할 때 검찰의 정의가 작동한다.
그러나 윤 전 총장은 특이하게도 정권을 겨냥해 ‘선택적 수사’의 칼을 휘둘렀다. 정권 대상 수사는 하나같이 과잉 수사 논란을 빚었다. 보수야당과 수구매체, 검찰 내부 수사에선 한결같이 봐주기·감싸기 의혹이 불거졌다. 김학의 사건을 뭉갠 검사, 룸살롱 접대를 받은 검사, 위증을 교사한 혐의를 받는 검사들은 대놓고 또는 교묘하게 봐주면서, 김학의 도피 출국을 저지한 소수 검사에겐 가혹한 칼날을 들이댔다. 이 부조리를 ‘선택적 정의’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다. 마치 선택된 일부 영역에서는 정의가 실현되는 듯한 착각을 주지만, ‘선택적 정의’는 사실 ‘총체적 불의’에 지나지 않는다. 정의는 공정과 공평을 본질로 삼는데, 선택적으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이 본질을 산산조각 내버리기 때문이다.
현대 자유주의 정의론을 확립한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정의의 기준을 합의하는 방식으로 ‘무지의 장막’을 칠 것을 제안했다. 자신이 부자인지 빈자인지, 주인인지 노예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원칙을 택할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검찰 수사에 적용하면, 특정 대상에게만 가혹한 ‘선택적 정의’란 정의일 수 없음을 직감하게 된다. 이야말로 윤 전 총장에게 결여된 철학이다.
게임이론에 ‘최후통첩 게임’이 있다. 어쩌면 유전자에 새겨져 있을지도 모를, 정의의 본질을 좇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준다. 실험 참가자 둘 중 한명(제안자)에게 10만원을 주면서 다른 한명(반응자)에게 임의대로 금액을 나눠주라고 한다. 제안자가 주는 돈이 얼마든 간에 반응자가 받기만 하면 둘 다 돈을 갖고, 거부하면 둘 다 못 갖는다. 합리적 선택 가설에 따르면, 제안자는 9만원 이상 갖는 게 가장 이익이다. 반응자도 1만원, 아니 100원이라도 받는 게 이익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안자 상당수가 5 대 5를 제시한다. 반응자도 8 대 2 이하 배분 제안은 다수가 거부한다. 뇌과학자들은 불공정에 대한 분노와 불쾌감이 금전적 이득마저 걷어차게 만든다고 본다. 사람은 정의가 없으면 불편하게끔 프로그램된 존재일지 모른다. ‘윤석열의 정의’가 왜 그토록 큰 분노를 촉발했는지도 짐작하게 한다.
정의의 원칙을 깬 윤 전 총장이 사회를 통합하고 이끄는 정치의 영역에 착근할 수 있을까? 스스로 ‘자격 미달’은 아닌지 돌아보기 바란다.
손원제 한겨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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