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호통치는 철학의 빈곤

● 칼럼 2012. 4. 7. 14:07 Posted by SisaHan
새누리당 박근혜 선대위원장이 이념을 좇는 세력에게는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한다. “수많은 도전에 직면한 대한민국 국회가 민생을 돌볼 생각은 않고 잘못된 이념이나 좇고 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다. 간곡한 우국충정처럼 들리는 이 말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려면 몇 가지 객관적인 통계가 필요하다. 기왕이면 한-미 동맹을 더 다진다는 의미에서 미국과 비교하는 것이 좋겠다.
한국인들 중에서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사람은 60%를 넘는다.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든 보수라고 생각하든 정치 무관심만큼은 똑같다. 미국의 진보나 보수 중에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사람은 15%밖에 안 된다. 이들의 투표 행위는 어떨까. 미국은 진보나 보수라는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투표율이 높고 중도의 투표율은 이들보다 20%쯤 낮다. 한국은 보수의 투표율이 가장 높고 그다음이 중도, 제일 끝자리가 진보이다. 역시 20%쯤 차이난다.

투표한다는 것은 우리의 운명을 함께 선택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투표에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후보에 대한 정보와 나름의 가치판단 기준을 가지고 하는 투표이고, 다른 하나는 관심도 정보도 없지만 ‘묻지마 투표’ 하는 것이다. 우리의 운명을 함께 선택하는 것이니만큼 묻지마 투표보다는 정보와 가치판단 기준을 가지고 투표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은 이런 바람과는 좀 거리가 있다. 한국인 중에서 묻지마 투표 했다는 응답은 45%쯤 되고, 관심을 가지고 투표했다는 응답은 35%선에 머문다. 우리의 운명을 함께 선택하는데, 생각이 같고 다르고를 떠나서 ‘아무 생각 없이’ 투표했다는 사람들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투표했다는 사람이 55%, 묻지마 투표가 25%이다.
한국에서는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지만 투표는 새누리당에 하겠다는 사람이 3분의 1쯤 되고, 거꾸로 스스로 보수라고 생각하지만 투표는 야당에 하겠다는 사람이 5분의 1쯤 된다. 미국에서는 진보의 80%는 민주당, 보수의 80%는 공화당에 투표한다. 이런 뚜렷한 표 갈림 현상이 미국에서 나타나면 양당제가 정착되었다고 하고, 한국에서 일어날 기미가 보이면 이념을 좇는다고 몰아붙인다.

정리해보면, 한국과 미국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미국의 유권자는 정치에 관심이 많고, 분명한 이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일수록 더 많이 투표하고, 자신의 이념에 충실하게 투표한다. 한국의 유권자는 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혐오하고, 계몽된 유권자로서 투표하는 사람보다는 묻지마 투표 하는 사람이 더 많고, 이념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막상 투표는 이념과 무관하게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87년 체제가 지속되어온 지난 25년 동안 많은 한국인 유권자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투표를 함으로써 스스로의 발등을 찍어왔다. 그리고 이 혼란스런 정치적 선택은 새누리당과 그 뿌리에 해당하는 세력의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

이념 좇는 세력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주장은 이 혼란스런 정치적 선택을, 따라서 자신들의 지배를, 한번 더 연장해달라는 주문이다. 투표는 하되, 아무 생각 없이 묻지마 투표 해달라는 뜻이다. 정치적 가치 따윈 상관없이 오직 지배할 뿐인 자신들에게 맡겨달란 뜻이다. 이념이란 다른 말로 철학인데, 이념 없이 어떻게 정치적 선택을 하란 말인가. 이념도 철학도 없다고 자백하면서 어떻게 감히 나라를 맡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철학의 빈곤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타인의 가치를 향해 호통까지 치다니‥.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