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차별 폐지 정열적 활동…향년 90세

비폭력 투쟁 앞장 공로 1984 노벨평화상

“노다지판”…흑인정권 탐욕 성토하기도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가 1991년 9월 요하네스버그에서 폭력을 종식시키로 하는 합의 현장에서 백인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 프레데리크 빌렘 데클레르크와 악수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의 상징인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가 90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로이터> 통신은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이 26일 투투 대주교의 별세 소식을 알리면서 “우리에게 해방된 남아프리카를 물려준 위대한 남아프리카인 세대와의 작별을 알리는 또 하나의 장이 넘어갔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1931년에 태어난 투투 대주교는 의사가 되려 했으나 형편이 여의치 않아 1955년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2년 뒤 신학교에 진학해 1961년에 사제가 됐다. 영국 유학을 마친 그는 1975년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요하네스버그 성모마리아교회 주임 사제가 됐다.

 

1978년 남아프리카 교회협의회 사무총장이 돼 흑인 권리의 대변인 활동을 본격화했다. 전국을 돌며 설교를 통해 흑백 차별을 제도화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강력한 반대자로 활동했다. 비폭력을 내건 그는 “우리 땅이 불타고 피를 흘리고 있다”며 국제사회에 남아공 백인 정권에 대한 제재를 호소하기도 했다.

 

그가 198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남아공 정권에 대한 국제적 경고이기도 했다. “불의한 상황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압제자를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은 그의 ‘투쟁 철학’을 대표하는 표현이었다. 그는 남아공 최초의 최초의 흑인 성공회 주교에 이어 최초의 흑인 대주교에도 올라 남아공의 성공회 교회 수장이 됐다. 투투 대주교와 넬슨 만델라(1918~2013) 전 대통령 등의 끈질긴 투쟁의 결과로 남아공은 1994년 평화적인 흑-백 정권교체를 이뤘다.

 

투투 대주교는 단호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태도로도 남아공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만델라 전 대통령은 “때로는 거칠고, 보통은 부드러우며, 두려움 없고, 좀처럼 유머를 빼놓지 않는 그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했다.

 

인종적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는 ‘무지개 국가’ 건설을 주창한 투투 대주교는 만델라 정권이 1995년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범죄를 조사하려고 만든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하지만 그는 백인 정권의 범죄뿐 아니라 이에 맞선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폭력도 같은 잣대로 평가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 대통령을 비롯한 흑인 정권의 부정부패를 놓고 만델라나 제이콥 주마 전 대통령을 겨누며 “노다지판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싸움은 정치가 아니라 도덕적 동기에 따른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말년의 그는 참다운 ‘무지개 국가’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투투 대주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땅 강점, 동성애자 권리, 기후변화 등 남아공 밖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 목소리를 냈다. 이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