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스토커 기자와 아양 언론

● 칼럼 2022. 12. 12. 12:4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마당 - 편집인 칼럼]  스토커 기자와 아양 언론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듯이, 귀담아 들어야 할 소리들은 귀에 따갑고 신경에 거슬리는 법이다.

불의에 눈감거나 물러서지 않고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소명에 충실한 언론의 비판적 소리가 위정자들의 귀에 달가울리는 없다. 그러나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아 권력을 행사하는 공직자들은 주인인 국민들의 쓴소리와 회초리를 달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머슴이 주인 눈치를 보기싫다면 당장 그만둬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공직자들이 국민의 위임을 받았듯이 언론은 -물론 사익이 아닌 공익에 승부를 건 언론을 말하지만- 국민을 대신해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언론의 질타를 무시해선 안되고, 귀를 기울이며 복무자세를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언론이 동네북 신세가 되어 버렸다. 특히 권력자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언론다운 언론’은 갈수록 심각한 면박과 배제의 대상으로 취급받는 현상이 일상화 되어가고 있다.

대통령의 상스런 발언영상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해외순방 특별기 탑승을 봉쇄하고 기자단에게 징벌해달라고 요구하는 기이한 사건은 국제적 망신거리가 됐다. 발언 영상이 수많은 매체에 보도됐는데도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언성을 높여 잡아떼는 것도 가관이었다. 특정 방송사 하나를 꼭 찍어서 “악의적인 가짜뉴스를 만들어 보도해서 동맹을 이간질했다“고 단정하는 기상천외한 비약은 가히 경이로웠다. 방송을 보고들은 수백만 수천만의 국민들은 ‘눈에 보여도 못보고 귀에 들려도 듣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되어 버렸다. “바이든이 아니라 국내 야당을 향한 말이었다”고 공식 브리핑으로 일부나마 인정했던 대통령 홍보수석은 틀림없이 정신이상자였고-.

 

언론이 조롱과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기자들이 “기레기” 소리를 듣게 된 것은 큰 불행이다. 언론답지 못하고 기자답지 못한 저널리즘의 타락상을 말해 주는 자업자득의 업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열심히 취재를 하려는 기자가 범법자 용어인 ‘스토커’로 전락하고 취재대상은 ‘신변보호’ 혹은 접근금지 대상자가 되어 아예 취재영역에서 제외되고 보호받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더구나 ‘스토커’는 짝사랑 상대나 빚진 자 같은 사적 이해관계가 얽힌 일반인이 아니라,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 특히 법무장관이라는 고위공직자를 취재하기 위해 쫓아다닌 열혈기자였다. 국민의 위임을 받아 세금으로 국록을 받아먹는 고위 공직자라면 매사 투명하게 봉직하면서 국민들이 까발리고 설명하라면 언제든 무엇이든 요구에 따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밀착 취재하는 기자들을 스토커라고 범죄인 규정하면서 처벌대상으로 삼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말라며 방호벽을 치고 위협하는 상식의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대법원이 “스토킹을 하지말라”고 그들의 손을 들어줬다니, 기자를 진짜 법적인 스토커로 만드는 데 법관이 거들고 나선 셈이다.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자유를 지켜줘야 할 최후의 보루라는 법원마저 본령을 저버리고 무소불위 검찰 위세에 쫄아든 것인지, 역시 상식의 반전이다.

 

그렇지 않아도 친정권 보수 일색인 언론 지형인데, 몇몇 비판적 언론사를 공박하며 지원예산을 삭감하고 민영화 칼을 빼들고 있다. 눈엣가시 기자를 고소하고 10억대 소송까지 한다. 듣기 좋고 입맛에 맞는 ‘아양 언론’만 남기겠다는 안하무인의 발상이다.

바로 세계 10대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대한민국에서 최근 목도하는 일들이다. 어쩌면 30~50년 전 군사독재 시절을 능가한다는 시각도 나온다.

 

30년 전, 도쿄특파원으로 활동할 때 일본 총리의 특별기에 동승해 한국을 방문한 기억이 떠오른다. 김영삼 대통령과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 총리가 경주에서 정상회담을 할 때였다. 과거사 반성과 사죄를 모르쇠로 일관하는 일본을 신랄하게 비판해 온 한국기자였지만, 일본정부는 총리 특별기에 선선히 태워주었고, 다행히 호소카와 총리의 진솔한 과거사 반성 언급을 취재하기도 했다. 정치 후진국 일본이 처음으로 정권교체를 이뤄 진보성향의 소수 연립정권 시기였다고는 하지만, 총리 특별기에 외국기자를 태우고, 특히 보도 논조를 따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금 돌아보아도 타산지석이다.

 

30년 전의 일본만도 못하다는 이야기다.  왕조시대에도 사관들의 목숨 건 직언과 선비들의 도끼상소(持斧上疏: 지부상소)가 있었기에 왕을 깨우쳐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었다. 군사 독재정권의 망령도 개탄스러울 진대, 한 술 더떠 치졸하고 조폭적인 언론핍박을 대놓고 자행하다니 무슨 전제 왕권인 줄 착각한다면, 제 발등 찍는 일이었음을 깨달은 때는 이미 늦다는 것을 유념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