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한마당]
새해의 가장 큰 소망은 무엇인가. 나는 우리 모두의 제일의 소망은 건강이라고 믿는다. 건강이 무너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건강은 신체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건강, 심령의 평안함이 중요하다. 마음이 편치 않아 임계선을 넘으면 육신의 병으로 도진다. 스트레스가 암을 유발한다는 경고는 괜한 말이 아니다.
그런데, 마음 평안하기, 넓게 보아 정신건강 지키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우리를 감싸고 평생을 붙어다니는 걱정과 불안, 공포와 분노, 강박 스트레스 등의 ‘평안을 해치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다. 넓게는 우주적-지구적인 문제들에서부터 우리 모국의 갈등 양상들, 작게는 가정과 개인의 사소한 고민들까지, 때로는 걱정을 안해도 될 뿐더러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기우(杞憂)성 염려들까지 끼어들어 머리 주변을 맴돈다.
그렇게 누구나의 일상에 필요악(必要惡, 숙명의 악)같은 존재라면, 공존하거나 혁파의 지혜가 필요하다. 슬기롭게 평정과 평안을 찾아 곧은 심지(心志)와 건강을 지키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성공한 인생일 것이다. 우리는 올 한해 건강한 삶을 위해 매일 부딪히는 외부적 충격파, 심리적 강박 요소들에 대처하고 다스릴 단단한 채비를 해야한다.
새해는 특히 여러모로 불안과 위기가 예고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아무리 험하고 속상해도 평정심을 잃지말되, 임계선까지는 지혜롭게 참는 고진감래(苦盡甘來)의 덕목과 인내의 철학으로 심신의 평안과 건강을 지켜냈으면 하는 소망이다.
지구촌의 거대한 불안들은 우리 삶과 마음들에 찬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동시간대를 살기에 전 지구적 문제들도 이제 개인적 심리의 영역에까지 큰 파장이 미치는 공통의 불안요소로 작용한다. 개개인의 내밀한 고민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삶을 압도하기도 한다.
2년째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가 기름값과 물가고, 고금리 등으로 직결되면서 올해는 더 쪼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커진다. 팬데믹에 멍든 비즈니스가 한층 더 힘들어지는 것은 아닌지, 일상이 팍팍해지면 공연한 화풀이도 늘어날텐데, 재수없이 동양인 표적범죄에 휩쓸리는 일은 없을지, 기후위기에 기상이변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폭설과 홍수, 허리케인, 정전 등의 재난이 언제든 덮쳐올 수 있으니 그 또한 안심할 수 없다. 3년이 넘도록 우리 곁을 맴돌며 파상공세를 펴고있는 코로나 위협에서도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글로벌 분석가들의 올해 어두운 전망 가운데는 전쟁불안이 번지고 있는 한반도 상황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자칫 화약고가 되는 것은 아닌지, 그러니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사람들은 날로 대결이 심화되고 있는 조국의 안위에 더 신경이 곤두설 수 밖에 없다. 핵 문제와 미사일 공방에서부터 드론 사태까지 긴장과 대결이 날로 격화되는데, 진정성 있는 대화노력은 없고 외교는 난맥에 빠져 ‘참사’니 ‘굴종외교’니 ‘국격추락’ 등 소식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외치의 연장선에서 ‘눈 떠보니 후진국’이라 자조하는 내정과 리더십의 난맥은 스트레스를 더한다. 국제기구가 한국은 공식적 선진국이라고 칭할 때 동포들 가슴이 뿌듯했었는데, 대통령이 국제무대에서 찬밥 신세인 걸 보고도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한국의 군사력이 세계 6위라고 든든해 하다가, 북의 드론이 서울상공을 헤집고 다녔다는 소식에 탄식한 연유도 그렇다. 경제와 사회는 어려워지는데, 가진 자 위주의 역주행과 무능, 검찰통치의 독선을 우려하는 소리가 갈수록 거세진다. 갈등을 조정하고 국정의 방향을 짚어 줄 정치와 국회가 실종과 표류상태를 맴도는 것도 한심하다. 홍콩과 미얀마 시위대들이 5.18을 선망이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 때, 아 우리 조국이 민주주의 선진국이구나 자부했는데, 교과서에서 5.18을 지운단다. 집회시위의 자유를 모르는지, ‘반헌법 세력’이라고 비판집회를 매도하는 대통령, 노조를 ‘북한핵’에 비유하며 적 무찌르듯 제압해 국제노동기구의 반감을 사고도 이긴 줄로만 아는 무도한 정권을 보며 분노지수는 높아진다. 비판언론을 쫓아내고 소송과 압수수색 반복으로 겁박하는 독재적 언론관 역시 국제 망신거리여서 창피한 까닭이다. 언론마저 제 갈 길을 잃으며 국민의 눈과 귀가 통제받는 40여년 전 암흑시대로의 역행을 개탄하는 외침이 들린다.
국제사회의 불안 요소들은 세계인 공통의 고민이어서 글로벌 공동체적인 집단지성과 해결의지가 작동하면서 일정한 방어선 형성이 기대된다.
하지만, 단일 정치-사회 공동체인 모국의 이슈들은 외력의 영향 보다는 거의 자력 해결해야 한다. 우리들과 후손들까지 직결된 세대불문의 상수(常數)이기에 관심이 커질 수 밖에 없는 문제다. 더구나 보편적인 국제기준과 역사적 연원, 상식과 양심의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때는 걱정과 불안, 분노 등의 지수가 높아져 맥박이 빨라지는 게 일말의 정의감이라도 있는 동포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자기가 처단한 국정농단 부패사범을 풀어주는 어이없음과 제편만 챙긴 뻔뻔한 사면 복권, 야당대표와 전 정권은 검사 150여명을 동원해 물고 늘어지면서 ‘증거가 차고넘치는’ 대통령 부인·장모 범죄는 모른 척 외면하는 내로남불의 극치, 아예 대놓고 뭉개고 덮어버리는 몰상식 사례들을 보고도 무감각하다면 정상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수십년 전의 퇴행, 아니 그것을 능가한다는 권력의 오만불손이 국민 정신건강에 심각한 위해를 끼치는 상황이다.
비정상과 몰상식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비정상이고 몰상식한 것이다. 부정과 불법, 불의에 무반응인 것 역시 부정하고 불법이며 불의한 것에 다름 아니다. 불공정과 불평등에도 불만이 없다면, 차별에 무감각하거나 공정과 평등의 의미를 모르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정상적인 상식과 균형감각을 지닌 이성과 감성의 소유자라면 불안과 분노지수가 높아지는 게 자연스런 현상이다.
정상이 아닌 상황을 접하고 솟구치는 분노와 마음의 격동을 달래고 평안을 찾기는 쉽지 않다. 어떤 이들은 모른 체, 회피해 버리거나 “누군 털어서 먼지 안나나” 하고 체념과 용인의 비겁을 택한다. 또 한 부류는 “꼴불견도 지나가려니”하고 삭이며 감내한다. 하지만 ‘벽에다 주먹질이라도’ 하는 열혈족들은 뛰는 심장의 에너지를 안고 광장을 향한다. 그들은 그래야만 분이 풀리고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힘들고 험한 세상을 살아오며 참고 또 참았다. 그래서 가슴에 응어리가 지고 한이 서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인내의 비등점을 넘어설 때는 무도하고 뻔뻔한 자들에게 침을 뱉고 주먹을 날렸다. 민심의 폭발과 정의로운 항거로 쌓이고 담아둔 한을 쏟아냈다. 수난의 민족사는 위기를 넘나든 백성들의 심적 울분 해소와 정신건강 해법을 말해준다. 아울러 민초들의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고 분노지수를 촉발시킨 자들의 인과응보 결말도 보여준다.
열등감을 포악으로 보상한 고부군수 조병갑이 상징하는 사이코패스적 학정과 착취, 끝없는 재물욕에 견디다 못해 동학농민 혁명이 일어났다. 이완용 등 매국 역적들의 변신에 폭발한 민중의 분노는 마침내 삼일혁명으로 분출했다. 반민특위를 친일 경찰로 무참히 해체시켜 일제 잔재 청산을 무산시킨 이승만은 김구 암살과 사사오입 개헌, 3.15부정선거 등 민심을 무시한 독재로 치닫다가 참다못한 4.19 학생의거로 쫓겨났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무소불위 독재가 5.18 민주화운동과 부마항쟁 등 수많은 시민들의 피와 눈물을 흘리게 한 현대사 역시 후안무치를 참다 못한 국민의 울분이 터져나온 것임은 역사가 말해준다.
하찮은 강아지도 제 잘못은 알고 머리를 쳐박거나 구석에 숨는다. 그런데 후안무치 권력은 부끄러운 줄도, 미안함도, 책임도 모르고 상대멸시, 국민무시로 일관해 소시오패스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의 쉬후이라는 역사가는 ‘뻔뻔하고 독한 자들 전성시대’라는 책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의 고통은 철저히 무시하고, 간악한 술책을 부려 남을 모함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며 살인과 나라를 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고 몰양심 권력자들을 서술했다. 철학자 애런 제임스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빗대 3대 ‘철면피 자질’을 거론했다. "철저히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처신하면서, (공복인 주제에) 자신에게 그럴 만한 권한과 자격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다른 사람이 불만을 표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했다. 1920년대 마피아 수장 알 카포네 조차 “(권력층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려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폭 두목이 언급한 묘사까지 너무 생생하고 사실적이어서 당황스러울 정도다.
문제는 조폭적 소시오패스 행태는 하루 아침에 개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에도 ‘악인들의 형통’에 대한 의구심을 곳곳에서 지적하고 있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자들이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렘 12:1). 하나님은 이에 대해 선한 자들을 연단시키기 위함이라면서 때가 이르면 반드시 심판하여 공의를 세울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고진감래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심판의 때를 안다면 참을 만하다 하겠으나, 끝없이 설치는 악인들의 작태를 감내하는 고통이 범인(凡人)들에게는 곧 응어리와 한이 되어 비등점을 향하는 것일 게다.
그래서 새해 건강의 화두는 우리에게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뻔뻔하고 독한 ‘머슴’들의 행태를 견디며 최대한 제어해 나가야 하니 보통 힘든 일인가, 비등점-임계점을 눈 앞에 두고 마음과 정신줄을 힘껏 붙들어 다잡아야 하는 현실, 무시당하는 주인들 처지가 된 우리 모두가 직면한 시대적 고민이다. 올 한해 ‘고진감래’의 지혜를 되씹으며 단단히 각오할 일이다. 사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연대와 심신의 건강을 다짐하며.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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