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상 보도 투쟁한 기자들, 5.18 보상법 포함해야”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기사 검열에 항거하다가 해직당한 기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다시 추진된다.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는 1980년 5월 20일부터 27일까지 신군부의 5.18학살 보도 금지에 항의하면서 검열 및 제작 거부를 벌였다가 해직당한 기자 1천여 명을 민주화항쟁의 한 부분으로 인정, 5·18 관련법에 포함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80년 민주항쟁 기간 전국적인 언론인 투쟁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해 5·18 기념재단, 기자협회,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등이 공동으로 언론인 투쟁 관련 백서를 만드는 등 역사적 기록을 공식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협의회는 “당시 국내언론이 정권의 나팔수 노릇만 한 것이 아니라 5.18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법률, 역사, 사회, 문화적으로 공론화해 더 늦기 전에 후대에 떳떳해지고 싶다”고 밝혔다.
 
현재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은 5·18 당시 투쟁하다가 사망, 부상 하거나 투옥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5·18 당시 신군부가 주도한 언론인 강제 해직 사건은 1990년대부터 국가 차원에서 진실 규명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등에 따라 공개적으로 실체가 드러났다. 앞서 정부는 지난 2002년 민주화 보상심의위원회를 통해 해직 기자 중 2백여 명을 민주화 관련자로 인정했지만 5·18 당사자에는 포함되지 않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1980년 불법강제해직언론인의 명예회복 및 배상 등에 관한 특별법안’이 4차례 제출됐으나 지지부진한 상태다.
 
한편 한국기자협회는 20일 광주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 ‘5·18 민주화운동 33주년 기자의 날 기념 토론회’를 열고 ‘5·18 민주화운동 33주년 한국언론 어디로 가고 있나’를 주제로 80년 해직 기자들의 명예회복을 촉구했다. ‘기자의 날’은 제작 거부 투쟁을 시작한 1980년 5월 20일을 기념해 한국기자협회가 지난 2006년 제정했다.


여러 사람이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데, 누군가 나에게 언어치료를 받아야 하는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인가 물었다. 대강 언어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한 할아버지가 빙그레 미소를 지며 “그게 바로 어릴 때 내 모습” 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분은 90이 넘으신 체스(Ches) 할아버지다. 
체스 할아버지는 우리가 70년 대 토론토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만난 사람 중에 한 분이다. 프린스 에드워드(P.E.I.) 섬 출신인 할아버지는 그 때 건장한 중년이었는데, 여름에 P.E.I.까지 찾아가 할아버지의 고향을 방문하여 많은 가족도 만나고, 빨간 섬의 농가에서 온갖 사랑을 받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아버지는 고향을 떠나서 도시에서 가정을 꾸리고, 평생 톱니바퀴(gear)를 만드는 일을 했다.
 
할아버지가 만든 톱니바퀴 중에는 일점 오센티 (1.5㎝) 의 작은 톱니바퀴에서 부터 육척이 넘는 할아버지의 키보다도 세배나 큰 톱니바퀴까지 크기가 다양하고 쓰이는 용도도 추측할 수 없이 많다고 했다. 체스 할아버지는 톱니바퀴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밀도라고 했다. 원형의 틀 주위에 박혀있는 수많은 톱니중 어느 하나라도 정확히 깍아지지 않으면 톱니바퀴가 제대로 돌지 못하여 다시 만들어야 하는 일들이 생긴다 했다. 두번째로 기계 속에서는 많은 톱니가 서로 물고 돌아가며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깍아 놓은 톱니도 용도와 환경에 따른 문제가 동반하게 되어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기계가 원활히 작동하도록 온갖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그 할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사람은 하는 일에 따라 생각과 사는 모습이 바뀌어가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는 원칙대로 정확히 사는 일이 몸에 밴 사람이다. 우선 무엇이 원칙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곳에 도착하기까지 긴 훈련이 필요해도 일단은 그 원칙을 받아 들인다. 자신이 정성들여 만든 톱니 바퀴가 무사히 돌아가기까지 조절하고 깍기를 거듭하는 것처럼 일단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조금씩 조금씩 주변에 적응해 나간다.
 
할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토론토에 도착한 후 지난 60년 이상을 시내의 한 교회를 지켜왔다. 그 긴 세월 신앙생활에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많은 여성들이 안수를 받고 목회자 직을 맡게 되었고, 토론토에는 여러 곳에서 온 이민자들이 정착을 하여, 중상층 백인들뿐이던 교회는 온갖 얼굴의 교인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성적 소수자들도 눈에 띄게 되었다. 예배의 형태들도 변화를 보여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으로만 이어지던 경건한 찬송은 기타와 드럼 소리에 맞추어 사람들의 감정이 더 많이 표현되는 복음성가들이 섞이기도 하였다. 
최근 거론된 교회의 변화 중에는 성적 소수자들을 목회자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익숙하지 않은 일을 받아들이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종교는 삶의 모태와 같이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감정을 모두 의지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가장 변화를 어렵게 받아들이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그 문제로 교회에는 많은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긴 회의 끝에 의장이 성적 소수자에 관하여 좀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교회의 입장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며 회의를 마무리지으려는 순간이었다. 늘 회의를 지켜만 보던 체스 할아버지가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할 말을 정리하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이야기했다,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일은 우리와 함께 예배에 참가했던 이들도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고 이들을 이해하는데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 라고 했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한 톱니바퀴로 사회라는 기계 속에서 조금씩 원활한 돌림을 시작하고 있다.
 
이제 할아버지는 교회에 참석하는 최고령자가 되었지만, 평생 하던대로 교회 건물과 시설들을 수리할 일이 생기면 자신이 고쳐보려 온갖 아이디어를 내 본다. 60년이 넘은 교회의 보일러는 할아버지의 기술과 지극한 정성으로 ‘바꿀 필요 없음’이라는 합격 평가를 받았다. 요즘은 연장 통이 힘에 버거워진 할아버지 뒤에 우울증으로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청년 하나가 할아버지를 도와 연장 통을 들고 쫓고 있다. 자신의 말처럼 할아버지는 말로 남을 설득하며 살아 온 사람은 아니지만 주변의 톱니바퀴들이 다 맞아 돌아가게 하기 위해, 지금까지도 갈고 조이기를 끊이지 않는다. 

< 김인숙 - ‘에세이 21’로 등단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심코 가톨릭교육청 언어치료사


[한마당] 흐릿한 청산의 후유증

● 칼럼 2013. 5. 24. 19:22 Posted by SisaHan
특별난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상품광고는 반복이 큰 힘을 발휘한다.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다가도 반복해서 자꾸 보고 들으면 관심이 쏠려 기억하게 되고, 괜찮은 제품인가보다, 그만한 함량이 있으니 저렇게 선전하겠지, 하는 끌림과 믿음이 생겨나 슬슬 지갑을 여는 것이다. 그러니 반복 선전은 광고심리학에 있어서 기본이다.
사람의 판단력에는 이성 보다 감성이 늘 앞서게 마련이어서 어떤 판단대상이 반복 주입될 때는 옳고 그르냐, 좋으냐 나쁘냐를 이성적으로 따져보기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런가보다’ 하는 무의식적 신뢰가 생기고, 더 나아가면 잠재적 신념으로 자리를 잡기까지 한다.
 
지난주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전후해 “5.18은 북괴군 600명이 침투해 벌인 폭동이었다더라” 는 등 북한 사주에 의한 반란이라는 식의 그럴 듯한 주장을 조선·동아 계열의 종편에서 잇달아 방송해 파문이 일었다. 아무리 영향력 미미한 종편이라지만 방송에서 버젓이 그런 주장을 떠들어 대는데, 더구나 북한군 출신이라는 탈북자가 나와서 큰소리치는 것을 시청하고 있노라면, 별 생각없는 범부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다” “맞아 그럴거야”라는 반신반의가 번질 수밖에 없다. 살벌했던 5공 군사정권 때 ‘북의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고 떠드는 선전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고, 당시의 주역들이 여전히 위세를 부리는 모습도 한 몫 거든다. 지금도 다수 보수권세가들이 ‘민주항쟁’으로 기꺼이 존숭(尊崇)하기를 망설이는 현실이니, “맞는 말일거야”라는 수긍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정부기관이 나서서 5.18 기념식장에선 무슨 노래를 부르지마라, 주먹을 흔들며 부르면 안된다는 억지를 부려 반쪽행사로 만든 꼴불견도, 반신반의에서 확신까지를 독버섯처럼 번져나가게 만든 반복선전의 악행을 거들었다. 이 곳 토론토에서도 어느 분의 지적처럼 항쟁의 뜻을 기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는 커녕 골프대회를 열어 즐길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오죽했으면 ‘원조 반공극우’라고들 하는 조선일보 출신의 조모 씨도 나서서 “말도 안되는 허구”라고 반박했을까. 당시 계엄하에서 삼엄한 포위망을 쳤는데 어떻게 그런 경계를 뚫고 북한군이 대량 침투한다는 것이냐며 헛소리하지 말라는 식으로 통박했다. ‘이성적으로’ 랄 것도 없이 가만히 따져보면, 뚜렷한 입증이 아닌 “그랬다더라”, “들었다”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막연함을 읽을 수 있음에도 ‘카더라’는 반복효과를 노리는 어둠의 세력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있는 것이다. 
5공 청산 과정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12.12쿠데타와 5.18 학살의 주범들은 ‘북괴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는 등 당시의 매도가 과장된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법정에서 시인했다. 대법원은 모든 자료와 정황을 판단해 1997년 4월17일 그들에게 내란죄 등을 적용, 최고 무기징역까지를 선고했다. 신군부가 권력 찬탈을 위해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사실이 법적으로도 명백하게 확정된 것이다. 그들에게 ‘내란 선동죄’로 사형당할 뻔했던 김대중 씨는 나중 다수 국민의 신임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5.18 항쟁의 사료들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 문화유산이 됐다. 그런 명명백백한 근거들을 알면서도 무슨 트집을 잡을 건더기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반성하고 트집을 잡아야 할 것은 과거청산의 흐릿함이다. 법적으로는 청산했다하나 정신적으로, 온정적으로, 또 차별적 감정으로 완벽히 청산하지 못하는 우리의 청산문화를 뜯어고쳐야 한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자들을 뒤늦게 단죄하고도 ‘정치보복을 없앤다’는 화해를 명분으로 곧 이어 사면해줬다. 피해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관용을 칭송하기에는, 지금까지도 반성없이 발호하는 그들의 뻔뻔한 모습들이 너무 심한 후회와 후유증을 낳고있다. 
사람은 흔히 자기를 합리화한다. 특히 자신의 허물이 있을 경우에는 기를 쓰고 덮고 뒤집으려 한다. 그 것은 궁지에서의 생존을 위한 호신 본능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나치면 사회악, 역사를 비트는 패역이 된다. 권력을 이용해 수천억을 뱃속에 넣고는 나랏돈 1672억원을 안내고 버티는 ‘배 째라’에, 무리를 이끌고 골프장을 활보하는 철면피는, 카리스마가 있다는 사내대장부가 아니라 그야말로 29만원 졸장부요 사회악이라고 할 밖에. 그리고 엄연한 5.18 항쟁사 마저 뒤집으려고 기를 쓴다. 과오를 철저히 처단하지 못한 탓이다.
 
어디 비단 5공의 주역들 뿐인가. 멀리는 일제에 부역한 자들을 철저히 청산하지 못한 때문에 민족정신을 흐리는 역사왜곡 시도들이 상시 고개를 든다.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려 하고, 일본천황에게 혈서를 쓴 투철한 친일과 남로당에 몸담았던 좌익행적도 문제시했다가 오히려 몰매를 맞는 모순 투성이 역사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괴이쩍은 합리화-. 역사의 고비마다 청산과 완결없이 두루뭉수리 넘어가는 우리네 ‘좋은 게 좋고’ ‘힘센 놈이 최고’라는 흐리멍텅 청산문화가 지금의 갈등과 적대의 원류라고 해서 틀리지 않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