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굴욕의 역사를 되새기는 이유

● 칼럼 2023. 8. 29. 13:0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굴욕의 역사를 되새기는 이유

 

 

삼국지(演義)에는 적군의 신출귀몰하는 계략에 넘어가서, 혹은 막강전력 위세에 눌리거나 풍문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항복하고 제발로 굽히고 들어가는 사례들이 나온다. 적벽대전에서 손권과 합세해 조조의 백만 대군을 물리친 유비와 제갈공명의 세력은 관우·장비 같은 걸출한 장수는 거느렸지만 본거지 영토도 변변치 않았고 군사도 겨우 수만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다윗에게 골리앗과도 같았던 조조의 대군을 초토화하는데 결정적 전략을 제공한 공명의 탁월한 전술과 선정을 펼친 유비의 덕망에 전의를 상실하고 지레 겁을 먹은 성읍들이 변변히 싸워보지도 않고 유비군에게 백기를 들고 나온다. 이로써 유비와 공명은 요지 형주를 근거지로 영릉, 장사, 계양, 무릉 등 양자강 이남 지역을 속속 차지해 당당히 삼국정립의 토대를 구축한다.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공해 경애왕을 죽게한 뒤 세운 왕이 신라 최후의 56대 임금 경순왕이다. 그는 8년을 왕위에 있으면서 고려와 후백제 사이 줄타기를 하며 국권을 회복해보려 하지만,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국력이 쇠잔해지자 서기 935년에 나라를 고려 왕건에게 바치고 만다. 군신회의에서 두 왕자까지 나서서 “어찌 1천 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의 나라에 넘겨줄 수 있습니까!”라고 성토하는 극구 반대를 뿌리치고 고려 복속을 결행한다. 신라는 망했고 두 왕자는 출가해 초라하게 살았는데, 경순왕은 고려에서 왕건의 두 딸을 ‘선물’받는 등 고관대작으로 40여년의 영화를 누리다 죽는다.

앞서 후백제의 견훤도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당하자 몰래 고려로 도망쳐 왕건에게 투항했다.

한국 역사에서 정세판단의 잘못으로 치욕을 삼키며 머리를 굽혀 적국 휘하에 들어간 사례는 또 있다.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을 맞아 청나라에 망국적 수모를 당한 삼전도의 굴욕은 그야말로 뼈아픈 민족사다. 군주가 오랑캐에게 항복한 정도가 아니라,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즉 머리를 땅에 찧으면서 3차례씩 9번을 엎드려 절하여 완전 굴복을 표해야 했다. 청나라의 신하국으로 몰락한 것은 물론, 왕자들이 볼모로 잡혀가고 수많은 백성이 끌려가는 곤욕을 치르며 나라가 절단나고 말았다.

신라 경순왕과 후백제 견훤의 고려 복속은 우리 땅에서 같은 민족에게 굽히고 들어간 사례다. 삼전도의 굴욕은 타민족에게 왕과 백성이 무참히 수모를 당한 사건이긴 하지만, 나라를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는 왜국 일본에 국권과 국토와 국민까지 모조리 빼앗긴 사상 초유의 민족 말살기를 열었다. 황후는 무참히 살해되고 황제는 폐위됐다. 백성은 일본천황의 신민으로 전락했으며, 창씨를 개명하고 조선말이 아닌 일본말을 써야했다. 국토는 일제의 전쟁물자 공급지로 수탈당했다. 수백만 청년들은 강제징집·동원되어 대동아전쟁 총알받이로, 군수공장과 탄광의 노동자로, 군위안부로 끌려가 이역만리에서 노예의 삶을 견뎌야 했다. 고종황제의 반대를 거스르며 나라를 팔아먹은 학부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조정의 권부에서 영화를 누리던 매국 5적은 일본제국에서 작위와 재물을 댓가로 받아 호의호식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로가 행복했을까. 결코 민족혼을 버리지 않은 독립영웅들에 의해 평생 암살 위협에 떨며 두리번거리고 살아야 했다. 이완용은 실제로 칼에 맞아 병약한 말년을 살았다.

요즘 한국 윤석열 정부의 ‘국익 저해외교’, 특히 일본과 미국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느니 ‘삼전도의 굴욕’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들이 회자되는 소란스런 현실과 지난 민족사가 오버랩 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최소한의 기준과 원칙도 없이 일본의 죄과에 면죄부를 주고, 영합하고, 대변까지 자처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태에 국내외 동포들은 “일본사람 아니냐!”며 울화를 꾹꾹 누르고 있다. 철지난 ‘멸공’과 ‘전체주의’를 외치면서 ‘바이든의 푸들’, ‘기시다의 꽃놀이패’가 되려고 안달하는 모양새에 불안 증폭은 물론 자존심도 망가진다는 지탄이 넘친다. 동해를 ‘일본해’라고 못박아도 끽소리 못하는 저자세와 굴종, 미국과 일본의 결속에 맹목 접근해 두 나라의 하위구조를 자처하는 ‘한미일 군사동맹’의 허장성세, 반면에 북한과 중국 러시아와의 적대를 심화시키고 있는 ‘자해적(自害的)-조공적(朝貢的)’ 외교를 보며 ‘방패막이 전쟁위기’ ‘일본의 제2 식민’ ‘독도는 무사할까’ 등등 국내외 동포들의 걱정과 원성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1년 반 사이에 경제 악화를 필두로 안보까지 나라 곳곳 성한 데가 없이 망가져 위기를 맞고있는 데다 밖으로 ‘국격’마저 계속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통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은 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보호조약을 강제하여 체결하였다…”. 100여년 전의 한반도 정세를 상기시키는 안팎의 경고를 불안하게 되새겨보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