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서울에서 열린 신라사학회에서는 서기 774년 당나라 장안(지금의 시안)에서 죽은 신라 왕족 김일용이라는 사람의 묘지명(墓誌銘) 발견 사실이 발표돼 관심을 모았다. 김일용은 당에 들어가 황제를 받드는 종3품 벼슬을 지내다 현지에서 죽었고,「조정을 받들어 섬기는데 만국보다 솔선하니 천자가 칭찬했다」고 세상을 떠난 김 씨를 황제가 크게 칭송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한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에 중국이 ‘이중국적자’를 황제의 측근 고위직에 거리낌 없이 기용했고 그가 황제의 총애까지 받았음을 묘지명은 입증해주고 있다. 그런데, 바야흐로 글로벌 시대요, 세계적 추세가 이중국적 허용 쪽으로 가는 21세기에, 요사이 우리는 왜 ‘시대착오적’인 이중국적 논란에 시끌벅적 한가?
미국에서 벤처성공 기업인으로 유명한, 특히 한국인 이민자로 자랑스런 1.5세인 김종훈 씨가 모국의 박근혜 정부 초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으로 발탁된 뒤 국내외에서 찬반논쟁이 뜨겁다. 미국의 한인총연합회라는 단체는 아예 ‘청문과정에서 이중국적에 시비를 걸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위협까지 하고 있다.
사실 디아스포라 한인으로 모국의 부름을 받아 공직에 봉사할 기회를 얻은 데 대해 반대하고 기분 나빠할 이유는 없다. 허용해가고 있는 마당에 이중국적으로 장관이 될 수 없다는 명분도 약하다. 더욱이 ‘미래창조과학’이라는 어감에서도 벤처 성공신화를 이룬 IT분야 전문인에 대한 기대 또한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김종훈 씨의 경우 차분히 따져보고 신중히 결정해야 할 근거가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선 그는 엄격히 말해 이중국적자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보도에 따르면 15살 때부터 40년 가까이 미국적으로 살다가 장관후보자로 임명되기 며칠 전인 2013년 2월14일에야, 일반인은 3개월 이상 걸리는 절차를 특혜와 편법으로 불과 3~4일 만에 처리받아 한국국적을 회복했다. 그리고 아직 미국적을 가지고 있으니, 이중국적은 겨우 일주일째다. 그는 가족은 그대로 둔 채 혼자만 한국적을 갖겠다고 당당히 말했다. 수년전 총리후보자가 자녀의 미국적에 트집잡혀 낙마한 전례와 대비될 뿐더러, 장관을 그만두면 다시 미국으로 가겠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의 기업과 삶의 터전이 미국이기 때문일 게다.
그는 미국에 살면서 충성스런 미국인으로 활동했다. 미국 해군장교로 7년간 복무하며 핵잠수함에 근무해 정예 기밀도 접했다. 그에게 한국인의 피는 흐를 지언정, 머리와 가슴에는 미국이 자리잡았고, 미국에 대한 애국심도 외쳤다. 공직자에게는 위민위국(爲民爲國)의 영혼과 충성심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국민과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해야 할 핵심부처의 장관이, 미국철학과 미국 충성심에 절어있는 사람이라면 말이 안된다.
그는 특히 미국 중앙정보국 CIA가 설립한 벤처캐피털 회사창립에 관여하고 이사를 지낸 사실과 자문위원 활동도 확인됐다고 들린다. 그의 인맥들은 미국의 고위인사가 대부분이다. 한국 과학 연구개발 정책을 총괄할 부처의 장관이 미국 정보기관 연계설이 나온다면, 한국의 첨단 과학정보, 정부의 기밀들에 대한 보안에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는 이중국적이 문제가 아니라, 미국정신과 미국 국익속에 살아 온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는 또 벤처기업으로 성공한 기업인일 뿐이다. 일국의 국정을 책임지는 최고 행정기관과 관료사회의 수장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전혀 모른다. 기업성공이 정부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음은 CEO출신에 기대를 걸었다가 너무 큰 낭패를 본 지난 5년의 MB사례 만으로도 설명이 족하다. 사회적 관습과 문화는 물론 한국 관료사회의 특성에 문외한이기에 더욱 불안하다.
무엇보다 왜 우수한 자국인이 많은 데도 미국인을 장관으로 모셔야 하느냐는 것이다. 혈맹도 좋고 친미·종미도 좋지만, 민족적 자존심도 돌아봐야 한다. 미국을 선망하고 좋아하다 못해 한국과 동일시하는 습성에 빠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미국의 국익이 한국의 국익과 일치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전후 일본에 독도를 양보하고 군사 독재정권들을 용인한 미국의 국익은 철저히 그들 중심인데도 말이다.
앞서 신라의 김일용처럼 외국에 나가 공직을 맡은 사례는 더러 있지만, 외국인을 정승반열에 앉힌 역사적 사례는 일제와 미군정, 식민이나 조공을 바치던 시절 외에는 없었다. 영국이 캐나다 중앙은행장을 스카웃한 것과도 경우가 다르다. 캐나다는 영국여왕이 국가원수인 연방국이다.
지금 한국이 미국의 속국인가. 따져보면 김종훈 장관영입은 단견이요 국가적 수치로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 김종천 편집인 >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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