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교황이 사임을 발표한 경우는 1415년 그레고리우스 12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정통성을 둘러싼 분쟁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니, 순수한 자진사임은 1294년 교황 첼레스티노 5세로 더 올라간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엊그제 ‘28일 사임’을 직접 발표한 일이 가톨릭은 물론 세계인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이런 전통 때문이다. 작은 전례 하나를 바꾸더라도 교회 전체가 수십 수백 번의 논의를 거치는 게 가톨릭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보수적이었다는 교황이 바로 베네딕토 16세였다. 오랜 전통을 깬 선종 전 사임과 이와 관련한 자기고백이 지극한 용기와 자기성찰의 결과로 받아들여지는 건 그래서 당연했다.
 
교황은 세계 가톨릭신도들의 영적 지도자에 머무는 건 아니다. 그의 언행은 다른 종교에도 영감과 감화의 원천이 되었다. 그 역시 7년10개월의 길지 않은 재임기간이었지만, 원칙에 충실한 삶과 언행일치로 종교계의 모범이 되었다. 쿠바를 방문해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해 성공회와 유대를 회복하고, 유대인과 이슬람교도에까지 이해와 교류의 폭을 넓히는 등 세계 평화에도 일정하게 기여를 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역사적 과오를 참회하는 데 인색했으며, 지구적 차원의 긴장과 분쟁, 빈곤과 기아 그리고 그 배후인 선진국의 문제를 드러내고 극복하는 데는 소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네딕토 16세의 사임 용기는 가톨릭이 본래의 소명을 되살리고 거기에 천착하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신도라면 당연히 빛과 소금의 직분에 충실했는지 돌아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후임으로 유럽계 백인을 벗어나 남미 출신이나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 출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것은 주목된다. 단지 피부색과 출신 지역 문제가 아니다. 생명과 평화와 정의에 목말랐던 이들이야말로 그 소중함을 알고, 이를 실현하는 데 온몸을 던질 것이라는 공감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