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읽고

● 칼럼 2013. 2. 18. 20:31 Posted by SisaHan
캐나다 한인여성회 발자취 엮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읽고

편안한 베이지색 배경에 자잘한 빨간 꽃을 담은 책 표지. 표지 그림은 내게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일곱 글자가 숱한 이야기 꽃을 피우던 대지를 떠나 어디론가 둥실둥실 올라가는 인상을 주었다. 제목을 보는 순간 한때 젊은이들에게 열병처럼 번지며 유행하던 ‘우리들의 이야기’ 노랫말이 꿈인 듯 아련하게 귓전을 울렸다. 
“우리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말간 마음뿐이라오. 밤하늘에 별만큼이나 수많았던 우리의 이야기들, 바람 같이 간다고 해도 언제라도 난 안 잊을 테요…” 
그러나 4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책은 나의 첫인상처럼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다분히 사료적인 가치가 돋보이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여성회라는 이름으로 1985년에 발족된 이래 가정과 생업을 제쳐 놓고 현장을 누비며 열정을 태우던 이사들이 일구어낸 20년간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 정도의 터전을 마련하기까지 어떤 정신과 자세로 매진해왔는지 진솔한 언어로 전하고자 과감하게 펜을 들었으리라.
 
‘우리들의 이야기’는 최기선, 이정준, 장정숙, 박영화, 백경자 등 다섯 전직 회장들이 편집위원이 되어 각기 맡은 분야를 자신만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세월의 힘에 밀려 누렇게 변색된 엄청난 문서와 기록들을 하나씩 헤집어 들춰내며 작업하던 과정에서 얻게 된 자부심 어린 결실일 것이다. 일년 남짓한 시간 속에서 그들은 잠들었던 과거의 흔적을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단호한 어조로 흔들어 깨우기에 이른다.
초기 설립자들이 감내한 열악한 환경에 대해 불평할 시간조차 없던 그들의 이야기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낮은 곳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한 성실한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최근의 이민과는 의미가 다른, 잡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발을 디딘 초창기 이민자들의 삶을 조명한다. 이민자들이라면 어쩔 수 없이 넘어야 하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정착하도록 일일이 손잡아 일으켜 세우던 기억들. ‘우리들의 이야기’는 특히 여성이기에 경험하게 되는 심리적 불안과 정체성 상실, 그로 인한 부적응 사례를 전문인을 활용한 교육과정과 적극적인 자원봉사로 극복해낸 기억들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펼친 헌신적인 활동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하다. 여권을 중심 과제로 삼아 취업뿐 아니라 가정폭력과 인종차별, 국제결혼과 정체성 문제, 정신대 사건과 건강세미나 등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고국의 전통을 남녀평등에 근거한 캐나다 사회에 접목하는 과정에서 여성으로서 겪는 갈등과 아픔을 최소화시키는 일도 그들의 몫이었다. 캐나다 정부로부터 비영리 자선단체로 인정받은 후에도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이 여성회 이사들만의 힘으로 가능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들의 치열한 노고가 눈물겹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숨은 그림자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민 덕에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성공담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여성회는 다 자란 나무가 아니다. 튼실한 뿌리를 내려 왕성한 성장을 하고 있는 푸른 나무에 물을 주고 가지치기를 하고 벌레를 잡아주는 등 정성을 다해 가꾸어갈 일들이 산재해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지나간 그들의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한인 1세뿐 아니라 이 땅에 자리잡은 2세 3세의 의식 속으로 파급되는 첫 걸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김영수 - 수필가, 한국문협 / 캐나다문협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