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무엇엔가 몰두 해 있을 때 내안에서 아리랑 가락이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잔잔한 허밍으로 혹은 즉흥적인 가사를 붙여가며 집안일을 줄여나갈 때는 안성맞춤인 가락이다. 혼자서 흥얼거리니 명창이 아니어도 들어줄만 하고 무엇보다 힘들이지 않아도 술술 나오는 그 노래는 꼭 중간에서부터 시작된다. ‘청청 하늘엔 잔별도 많고…….’ 거기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어느 날 잠자리에 들다가 헤드 테이블에 놓인 L 선생님의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란 수필집이 눈에 들어왔다.
“여보! 저 책 제목 좀 이상하지 않아요?”
“새삼스레 어때서? 좋기만 하구만.”
“순간적으로 느낀 건데 저 노랫말에 미심쩍은 구석이 둘 있는데 뭐게요?”
“응! 둘씩이나? 입에 붙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하나는 ‘청천 하늘’이에요. ‘청천 하늘’을 한글로 풀면 ‘푸른 하늘 하늘’이 되는데 하늘이 두 번 겹치는 점이 그렇고, 다른 하나는 푸른 하늘에 별이 많다는 게 모순이 아닐까요?”
“듣고 보니 그렇긴 하다만 살다보면 어디 까만 하늘에만 별이 있냐구. 하늘이 노래지며 온갖 별이 빤짝빤짝 할 때는 어쩌고?”
그랬다. 살다보니 밤하늘에만 별이 반짝였던 게 아니었다. 하늘색이 울긋불긋해지며 큰 별 작은 별 쾅쾅 터지던 순간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옆에서는 숨소리가 깊어 가는데 나는 눈앞에서 번쩍이던 숱한 별을 떠 올리며 잠 못 드는 밤이 되었다.
가끔 누군가가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쉽냐고 물어오면 나는 서슴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젊음이 아무리 찬란하고 아름다워도 굽이굽이 넘어야 할 태산을 감내 할 자신이 없어서다. 하지만 요즈음엔 옆집 새댁을 보며 조금 변화가 생겼다. 그녀에 대해 특별히 아는 것은 없지만 안정적인 환경에다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모습에서 저 정도의 여건이라면 한 번 쯤 그 언저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지나온 삶과는 다른 궤적이어야 할 것이다.
부엌 개수대 앞에 서면 옆집 창이 엇비슷하게 보인다. 나는 종종 호기심어린 눈길로 그 창을 기웃거리며 단순 노동의 무료함을 달랜다. 아마도 창 안엔 책상이 놓인 듯 하고 거기에는 무언가에 몰두 해 있는 인기척이 자주 잡힌다. 오늘처럼 흐린 날엔 대낮에도 스탠드 불이 켜졌고 햇볕이 좋은 날은 블라인드를 움직이며 채광을 조절하는 손길이 가깝게 느껴진다. 나는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뭔가에 열중하는 그녀의 직업은 필시 작가이리라 단정해 놓고, 오늘은 무엇을 썼을까, 진도는 얼마나 나갔을까, 나름대로 궁금함을 키운다. 그러다가 어느 사이 만능 글쟁이를 거기에 앉혀놓고 시시각각 그녀를 공 굴리 듯 한다.
눈발이 흩날리는 이런 날은 소설을, 마음이 헛헛한 날은 수필을,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에는 시인으로 둔갑시켜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달콤하다. 기혼녀의 이십대 후반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버리고 사는 시기이다. 결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여자의 길에서 자신을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힘겹던 시절에 비해 단출하면서도 진취적인 삶을 사는 그녀가 부럽기도 했는데, 어느 날 나의 꿈을 깨우는 일이 생겼다.
아침 출근의 번잡함이 끝난 고요한 시간에 짐승의 포효 같은 대단한 외침이 들려왔다. 호기심에 창밖을 보니 휴대폰을 어깨에 걸친 새댁이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엇엔가 분을 삭이지 못한 그는 선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기도 하고 좁은 담장 안을 정신없이 오락가락 하기도 했다. 꽤 긴 시간동안 누군가와 심한 언쟁을 벌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청천 하늘에 숨어있던 잔별들이 한몫에 터져서 평온한 일상을 뒤흔드는 삶의 뒤안길, 색깔만 다를 뿐 누구도 비껴 갈 수 없는 고행의 길이다. 나는 그 창에서 나의 젊은 날의 회한을 거둬들인다. 그리고 더디지만 쉼 없는 행보로 꿈을 향할 각오를 마음에 새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에세이스트’로 등단 / 한국문인협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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