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학위 논문을 두 번이나 쓰고도 학위를 받지 못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20여년 전 미국 테네시대학의 포크너라는 학생은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제출했는데, 주제가 군사기밀에 관한 것이라는 이유로 통과되지 못했다. 미리 학칙을 챙겨 보지 못했던 지도교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자신의 논문을 베껴 쓰도록 허락했고 새 논문은 심사를 통과해 학위가 수여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학이 표절이라는 이유로 학위를 취소해 버렸다. 결국 학생은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재판에서 원고는 표절이란 저자의 동의 없이 가져다 쓸 때 성립하는 것인데, 자신의 경우는 저자의 동의가 있으므로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법원은 표절을 원고처럼 정의하면 학위논문의 정직성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면서, 표절을 용인한 지도교수뿐만 아니라 그의 비호 아래 숨으려는 학생의 신뢰도 잘못된 것이라고 판결했다.
표절은 저작권 침해와 달리 저자의 동의로도 면책되지 않음을 확인한, 지극히 당연한 판결이다. 논문에 대한 저작권 침해는 친고죄로서 피해자인 저자가 문제 삼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 그러나 표절은 다르다. 표절당한 저자 외에 학계와 독자 전체가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박사학위 논문을 표절했다고 해서 논란이 뜨거운데, 최근 논의가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어 안타깝다. 미국 교수의 논문을 상당 부분 출처표시 없이 베낀 것은 인정하면서도, 사전 또는 사후 허락이 있었는지에 대한 진실공방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표절당한 사람의 동의나 용서 여부는 표절 성립과 무관하고, 단지 정상참작 사유가 될 수 있을 뿐이어서 낭비적인 논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밖에 표절 의혹 당사자들의 반응으로 당시에는 표절금지윤리가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표절 판정과 자리를 연계하여 시간끌기를 하는 등 다양하다. 최근에는 표절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경우도 등장했다.
조선조 실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양반집에 들어간 도적이 훔친 여자의 속곳을 어디에 쓰는 물건인 줄 모르고 벙거지처럼 쓰고 다녔다는 것에 비유하여, 남의 시문을 함부로 가져다 엉뚱하게 쓰는 표절자를 슬갑도적(膝甲盜賊)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남의 글을 자신의 것인 양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는 어제오늘 생긴 것이 아니다.
독일은 메르켈 총리 재임 기간 중 장관 두 명이 박사학위 논문 표절로 총리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국방장관은 이미 사임했고, 최근 학위가 박탈된 교육장관도 사임 압박을 받고 있다.
새 정부가 출범했다. 앞으로 며칠간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논문 표절은 단골 검증 메뉴로 등장하고, 이 과정에서 박사학위가 짐이 될 사람이 분명 나올 것이다. 그런데 표절이 공직 수행에 결격사유가 될 수 없다는 동정론이 등장하고, 정작 파수꾼이어야 할 지식인들이 침묵의 카르텔로 이를 덮어버린다면, 학계와 우리 사회의 도덕 수준은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게 될 것이다.
마침 졸업철이다. 표절 논란의 근본적인 책임은 과욕을 부린 표절 당사자에게 있을 것이지만, 심사를 허술히 한 대학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최근 논란이 된 사건에서 표절이나 연구윤리 위반이라는 판단을 발표한 대학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바 없어 안타깝다.
< 남형두 -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저작권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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