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DO YOU SEE WHAT I SEE?

● 칼럼 2013. 3. 1. 14:44 Posted by SisaHan
남편과 나는 가끔 색깔의 이름때문에 실랑이를 벌이다 웃곤한다. ‘서랍안에 있는 하늘색 지갑안을 찾아 봐요.’ 그러면 남편은 서랍 맨위에 단정히 놓여진 지갑을 옆으로 밀쳐내며 서랍안을 뒤진다. ‘ 없는데... 올라와서 찾아봐.’ 먼 발치에서도 보이는 하늘색 지갑은 이미 몸의 일부가 서랍밖에까지 올라와 있다. ‘ 아니 그 위에 있는 것도 안보여요 ?’ ‘ 이거 ? 이게 하늘색이야 ? 이건 회색이구만…’ 기가 막혀 잠시 말없이 쳐다보다가 서로 피식 웃고 만다. 여기에 영어 표현까지 더해지면 더욱 대책없이 흘러가는데 BURGUNDY와 PURPL에 이르면 우리는 그저 뻘건 이것의 이름이 진홍색이든 자주색이든 개의치 말아야 한다. 고백하건대 나에게 색의 명칭은 무척이나 단순해서 어린 시절 18색이나 24색 크레파스에 딸린 이름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경우 대개 나는 남편에게 지고 마는데 그건 ‘ 내 크레파스는 48개 짜리였다’고 주장하는 남편이 나보다는 더 많은 색깔의 이름을 받아들였으리라 인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40여년전 크레파스 공장 사장님의 과학적 근거 없는 작명술에 의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검은 색의 옷을 즐겨 입는 나는 가끔 검은 울코트와 비스코스가 섞인 검은 울바지와 검은SUEDE구두를 맞춰 입고 각각 다른 검정을 바라보며 고민한다. 맞추어 입었지만 그들이 가지는 색조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색조라고 표현되는 단어는 영어로는 순색에 검정을 더한 SHADE와 순색에 흰색을 더한 TINT, 또 순색에 검정과 흰색이 합해진 TONE으로 다르게 일컬어진다. 순색에 더해지는 색과 양에 따라 우리에게 보이고 감지되는 색은 다르게 인식되고 다른 느낌으로 전달된다. 그러다 보니 같은 푸른색을 같은 장소에서 본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같은 이름이 떠오르기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에 개인적인 경험과 취향이 더해져 어떤 이는 순색인 파랑쪽의 느낌을 강하게 받고, 어떤 이에게는 추가되는 흰색 쪽의 느낌이 강하게 전해지면서 그 색에서 연상되는 느낌은 개인적인 것이 되고 만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바다를 연상하면서 차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고 어떤 사람은 봄기운과 희망이 가득한 하늘을 떠올리며 온기를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보여지는 색과 그 인식에 관한 나의 관심은 여행중 비행기에서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 시작되었다. BBC가 제작한 ‘Do you see what I see ?’라는 다큐멘터리는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힘바족을 통해 언어와 감각과 의식이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들이 가진 색의 이름은 모두 다섯가지. 모든 색은 이 다섯가지 중의 한 이름을 갖는다. 우유와 물은 다같이 하얀색이며 파랑과 연두는 그들에게 한가지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그들은 파랑색 중에 섞인 연두색을 구별해내지 못했다. 보지못한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힘바족의 독특한 색의 체계를 통해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감각을 넘어온 의식의 단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눈에는 다른 색이라 할지라도 한가지의 이름을 가진 것은 감각의 의지를 넘어 인식의 단계에서 그냥 하나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언어가 가진 무서운 힘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사물에 대한 주관적인 개념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너머 더 깊이에 담겨진 무엇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다. 언어는 태생적인 불완전성을 통해 더 큰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파랑과 연두가 같은 이름을 가진 뜻밖의 (?) 세상이 우리 앞에 가능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남편과 나는 이제 색의 이름에 대해 문제삼지 않는다. 이름은 달라도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있으므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결혼기념일에 자기가 사주었던 지갑안을 찾아 보세요.’ 라고.

< 김유경 시인 - ‘시.6.토론토’동인,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