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학회의 고교용 한국사 교과서가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심의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학회는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모임으로 일부는 지난 2008년 전경련 후원으로 대안교과서를 발간한 바 있다. 당시 책자엔 일제 병탄기를 근대화 역량 축적기로 설명하고, 김구 선생을 항일테러리스트로 기술하는가 하면, 이승만과 박정희 체제를 미화하는 내용이 포함돼 논란을 빚었다. 이번 집필자의 성향이 대안교과서 집필자와 다르지 않아 새 교과서 내용을 미루어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현대사학회 등 뉴라이트 쪽은 이를 계기로 다시 한번 현대사 뒤집기에 총공세를 펴고 있다. 며칠 전 <조선일보> 후원으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이들은 일제히, 그러나 앵무새처럼 다른 교과서의 사실과 다른 ‘좌편향 문제’를 트집잡고 나섰다.
현대사학회에는 역사연구보다는 정치적 역사해석에 치중해온 비전공자가 많이 참여한다. 이들의 빗나간 주장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근거가 희박한 주장, 편향된 극소수 정파적 시각을 교과서 내용으로 용인했다면, 국사편찬위의 심의 자세는 비난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검정 교과서의 취지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시각을 담는 것은 권장해야 한다. 하지만 식민지근대화론이나 독재체제 미화, 이를 위한 사실왜곡 등까지 용납할 순 없다. 위원회는 다른 교과서에 대해서는 김활란씨 관련 서술이나 임시정부의 구성 문제에 대해 공지의 사실까지도 수정하도록 요구했다고 한다. 위원회가 관변 학자들의 정치적 도발에 멍석이나 깔아주고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교과서 집필자 가운데 한 사람은 기존 교과서에 대해 “보편적 헌법 가치 대신 특정 사상적 가치를 중심에 두고 서술하고 있다. 친일·반일, 민주·파쇼라는 가공적 대립을 역사관으로 삼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어이가 없다. 최고의 헌법적 가치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다. 국가가 굳건해야 하는 이유도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국권을 강탈하고 국민을 노예로 삼은 일제의 침략과 약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한 독재정권에 대해 교과서가 어떻게 기술해야 할지는 자명해진다. 그러나 이들이 요구하는 관점은 엉뚱하게도 긍정적 정체성 심어주기다. 병탄이건 반민주건 긍정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일까. 역사가 사실과 달리 특정 목적에 따라 기술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쪽으로 기술하는 것은 더더욱 피해야 한다. 그건 역사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다.
국사편찬위는 역사를 관변 학자, 자본과 권력의 시녀 학자가 농단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최종 심사는 저들 말대로 헌법적 가치가 구현되는 쪽으로 해야 한다. 위원회가 역사왜곡의 들러리가 되지 않길 바란다.
'●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00자 칼럼] 지금이냐, 아니면 나중이냐 - 그것이 문제로다 (0) | 2013.06.09 |
---|---|
[한마당] 장물을 유산으로? (0) | 2013.06.09 |
[칼럼] 아버지가 있는 마을 (0) | 2013.06.09 |
[사설] 법무장관이 검찰 독립성을 짓밟아서야 (0) | 2013.06.09 |
[칼럼] 미국 경제 ‘호황’은 아직 이르다 (0) | 2013.06.01 |
[사설] 불량 부품으로 가동되는 부실 원전 (0) | 2013.06.01 |
[사설] 경찰, 축소에 ‘증거인멸’까지 했나 (0) | 2013.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