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리 안의 야스쿠니

● 칼럼 2014. 1. 13. 19:50 Posted by SisaHan
지난달 26일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겨냥해 세계 각국의 비판이 줄을 이었다. 그 대부분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신사에 총리가 참배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미국 국무부는 그런 관점에서 “실망했다”는 성명을 내놨고, 한국 국회도 지난달 30일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명백히 위협이 되는 행위”라는 결의안을 내놨다. 
‘신사 참배는 동북아 안정에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바보 같은 짓이다.’ 아마도 이런 실리적인 견해가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바라보는 평균적인 시선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신사에서 A급 전범이 분사되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특별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은 이방인들에겐 야스쿠니는 어찌되든 상관없는 문제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우리가 야스쿠니 문제를 인류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자인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는 2005년 펴낸 <야스쿠니 문제>라는 책에서 신사의 본질을 ‘감정의 연금술’이라는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아들이 전쟁에 나가 숨지게 되면 어머니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일왕을 통해 야스쿠니에서 아들이 일본을 지킨 ‘군신’으로 모셔지는 순간,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치환되고, 그래서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은 이제는 손자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성스러운 의무로 뒤바뀐다. 그렇게 국민들이 다음 희생과 전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평화는 멀어진다. 이것이 전쟁 시기 야스쿠니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야스쿠니신사와 나란히 붙은 역사관인 ‘유슈칸’을 방문해 보면, 신사의 이런 기능이 전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엔 지난 전쟁은 침략이 아닌 ‘자위전쟁’이었을 뿐이고 A급 전범들도 범죄자가 아닌 국난이 닥쳤을 때 자신을 희생한 ‘쇼와 순난자’라는 사실을 강변하는 전시물들로 가득하다. 신사 한구석에는 도쿄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들에게 무죄 의견을 냈던 인도인 라다비노드 팔 판사의 기념비도 찾을 수 있다.
 
지난 전쟁은 어쩔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자랑스러운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박물관에 실물 모형으로 전시돼 있는 제로센과 가이텐(인간어뢰)을 타고 자살공격에 뛰어든 선배들처럼 우리들도 그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게 신사의 가르침이다.
가미카제를 칭송하는 과격한 문구들을 보면 ‘우리가 잊지 않을 테니, 너희는 용감하게 나가서 죽으라’고 누군가 등 뒤에서 떠미는 듯한 느낌마저 난다.
그곳엔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자국민 310만명을 숨지게 하고, 이웃 나라들한텐 그보다 더 큰 고통을 안긴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런 무감각과 파렴치함은 사실 인류사에서 매우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 때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끝내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인들의 마음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필요한 전쟁이었다고 강변하는 미국인들의 마음에 어느새 야스쿠니는 똬리 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야스쿠니 문제란 좀처럼 과거를 극복하지 못하는 일본인의 문제임과 동시에 인류가 다 함께 손잡고 고민해야 할 양심과 정의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우리가 베트남을 부인하고, 용산을 잊고, 한국전쟁 시기 이뤄진 양민학살을 정당화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거대한 아베 신조가 되는 것이다.
< 길윤형 - 한겨레신문 도쿄특파원 >